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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irector of/얕은 생각의 깊이

익숙해 진다는 것

kimdirector 2021. 1. 15. 16:47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정음사, 1968)의 가장 끔찍한 전언은 맨 앞 대목에 숨겨져 있다: "... 그러나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라... 그 동물은 체념에도 쉽게 익숙해진다. 불편하고 더러운 것, 비인간적인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모습은 더러운 것인가, 안 더러운 것인가? (71p)

김현 지음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김현 지음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익숙해 진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축복'이자 '한계'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대로,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힘든 일도 견뎌낼 수 있지요. 생존력의 원천입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거나 실연을 당해 힘들어도 시간이 흐르면 바뀐 상황에 익숙해 집니다. 그럴 수 있으니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군입대 등 새로운 환경에 처해 못견딜 정도로  힘든 듯해도 시간이 지나면 역시 적응을 합니다. 혹한이나 혹서 등 날씨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못살 것만 같은 알래스카나 적도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 기후에 익숙해진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런 '익숙해짐'은 종종 우리에게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굳었던 연초의 결심이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나태함에 익숙해 지고, 비루한 현실에 체념하며 그대로 적응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불의(不義)에 익숙해지고, 당장의 편안함에 익숙해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를 한계 지어주는 이런 익숙해짐에서는 의식적으로 떨쳐 일어나야지요.

비오는 초가을 저녁, 1990년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유고인 그의 '일기'를 들춰보다,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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