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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디자이너라면..

트랜드와 디자인 완전 기초

kimdirector 2021. 1. 10. 17:07 

주의! 이 글은 완전 초보용이다
트렌드가 뭔지, 디자인은 또 뭔지, 그래서 트렌드와 디자인이 어떤 관계인지, 디자인DB 홈페이지에 왜 트렌드 관련 글이 이리 많은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수준의 글로서 지구에서 가장 심심하게 썼다. 그러니 트렌드 전문가, 각계 저명인사께서는 이 글을 삼가기 바란다. 너무 수월해서 한 숨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트렌드는 대단해 보이지만, 정말 별 것 아니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일컫는 매우 일반적인 명사다. 본디 뜻은 사전을 찾아보면 될테고, 디자인 현장에서는 이 단어가 “구릿빛 황금 도금이 대세,” “모서리를 날카롭게 잡는 것이 유행,” “엉덩이 큰 차는 지고 엉덩이 짤린 차가 뜬다”는 식으로 응용된다. 이러한 트렌드를 대단하게 보는 이유는 조촐하게나마 미래를 더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점쟁이처럼 뜬금 없는 직관력과 불손한 어투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전후 관계를 차갑게 해석한, 파워포인트로 예쁘게 꾸며서 프레젠테이션 해 주는,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미래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미래를 예견” 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설명”한다는 표현이 옳겠다.

 


점쟁이는 트렌드가 아니다
“에스닉한 프린트가 찍힌 옷이나 벽지, 인테리어 소품 등이 유행한다”는 말로만 끝내면 점쟁이의 예견이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타율 높은 점쟁이 말이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면 된다. 반면 트렌드 전문가는 점쟁이처럼 말하지 않는다. 좀 장황하지만, 이렇게 한다. “전 세계가 함께 놀란 911 테러 이후, 비행기 안전 및 안전 전반에 대한 겁이 겁나게 많아 졌고, 이후 외부의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욕구가 은연 중에 강해졌고, 그래서 비행기 타고 다른 나라가는 게 겁나서 비행기도 잘 안 타게 되었고, 하지만 다른 나라 전통 풍물은 즐기고 싶고, 그래서 다른 나라의 전통을 (비행기 타고 가지 않고) 의식주에서 안전하게 즐기는 방법으로 에스닉한 프린트가 들어간 옷을 입고, 에스닉한 무늬의 벽지 바르고, 에스닉한 장식품 걸어 놓고, 해외 전통 요리 집에서 만들어 먹는 라이프스타일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설명 하면서 “버추얼 노마드”라는 멋진 영어 하나 콕 찍으면 훌륭한 트렌드가 된다. 천지신명이랑 말을 튼 점쟁이라도 이런 말은 못한다.

 


트렌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
“전 세계를 하나로 엮은 인터넷의 활성화, 그것과 함께 세계를 움직이는 세계 교역의 원활함에 힘입어 자동차 앞모습이 강렬해졌다. 자동차에서 입이라고 할 수 있는 라디에이터 그릴이 커졌고, 눈이라고 할 수 있는 헤드램프는 동그란 광원을 중심에 넣어 마치 부릅뜨고 있는 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쓰여진 트렌드를 읽고 라디에이터 그릴을 크게 디자인하고, 부릅뜨고 있는 헤드램프를 그렸다면 70점 짜리 디자이너다. 말 그대로 최신 트렌드를 따라 디자인 했으니 오답은 아니겠지만, 너무 순진해서 70점 밖에 못 받는 것이다. 80점 짜리 디자이너는 한 걸음 거슬러 올라가 강렬한 인상에 집중한다. 70점 짜리 디자이너처럼 큰 그릴과 또렷한 램프에 머물지 않고, 작지만 쐐기처럼 날카롭게 잘린 라디에이터 그릴, 또렷한 광원은 (원가 절감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모양을 독수리의 눈처럼 다듬은 헤드램프를 디자인으로 강렬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 90점 짜리 디자이너는 또 한 걸음 더 거슬러 올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수 있는 자동차를 디자인한다. 이를 테면 디자인 스토리가 매력적인 디자인을 한다던가, 사진을 특히 잘 받는 차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100점 짜리 디자이너는? 모르겠다. 자동차 디자인의 귀재, 크리스 뱅글(전 BMW 디자인 책임자, 현재 무직)도 “100점짜리 디자이너는 없다”고 말했다. 

 


트렌드는 돌고 돈다?
디자이너에게 트렌드는 대략 이런 느낌이다. 그런데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트렌드가 딱히 잡히지 않는다. 어디서 비행기가 빌딩에 쳐 박히는 엽기적인 사건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전 세계 경기 침체로 지갑이 닫혀서 그런 건지, 아무튼 뜨겁게 달아오르는 핫 트렌드가 없는 작금의 현실은 다소 따분하다. 아마도 수년 동안 트렌드, 트렌드하면서 다들 쫓아가다가 경쟁력이 없어지니까 다들 흩어져서 트렌드를 피하며 디자인하는 것 같다. 디자이너와 인터뷰를 해 보면 트렌드를 분석하지만 일부러 무시하고 디자인한다는 이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트렌드가 되면 됐지, 누굴 따라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디자인은 제각각이다. 자신만 할 수 있는 독특한 조형성을 앞세워 독보적으로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런 말도 읽었다. “‘오버’하는 디자인의 시대는 갔다” 곱상하게 생긴 폭스바겐 신형 골프를 발표하면서 폭스바겐 그룹의 디자인 대장인 발터 드 실바가 한 말이다. 그 동안 너무 잘난 척 하는(크리스 뱅글이 한 BMW 디자인 같은 것) 차들이 많아서 이제 다시금 얌전한 디자인을 찾는다는 얘기다. 때마침 친환경 디자인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으니 다소곳한 차들이 속속 나타날 것 같다. BMW 디자인웍스에서 일하는 매그너스 애스피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비우는 디자인이 아름답다”며 “지금까지 디자인이 뭔가를 자꾸 채우는 디자인이어서 이제 그 한계가 온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트렌드는 돌고 돈다’는 뻔한 문구에 떨어지게 된다. 서로 이기려고 오버하는 디자인 하다가, 그게 식상해서져서 오버하는 디자인의 시대가 갔다 하고, 이것이 또 지나면 심심한 디자인을 뚫고 오버하는 디자인이 유행하겠지. 역시 트렌드는 돌고 돈다.

 

 

 

 

경제가 어려우면 섹시해 진다
요즈음 같은 초 불황 속에서 여자들이 아찔한 치마를 입는 걸 보면, 불황에는 치마가 짧아지고, 호황에는 치마가 길어진다는 말이 헛소문은 아닌 것 같다. 혹자들은 천이 모자라서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하지만, 미니스커트가 유행 중인 어떤 나라에서도 천 부족 현상은 없다. 다른 쪽에서는 ‘여성의 유혹’이라는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을 설명한다. 먹고 살기 힘든 상황 속에서 남녀 관계도 소원해지고, 그래서 다리를 드러내면서 유혹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돈벌이도 시원찮은 퍽퍽한 일상 속에서 그녀의 매끈한 다리를 보면 힘이 절로 솟는다. 너무 힘차게 일하다가 경제가 좋아지면 어쩌지?

짧은 스커트와 함께 그녀의 입술도 에로틱하기 그지없다. 요즈음에는 핑크빛 찬란한 립스틱과 함께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듯,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입술이 유행 중이다. 이것 역시 힘 빠진 남자들에겐 에너지와 같은 존재다. 입술과 함께 극단적으로 눈 주위를 꾸미는 색조 화장품, 다리를 극단적으로 길어 보이게 하는 킬힐(하이힐 보다 높은 하이힐), 킬힐을 좀 더 편안하게 즐기기 위한 발 보정 제품, 다리를 보다 미끈하게 간직하기 위한 제모 제품 등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한 쪽에서는 경제가 어렵다며 고군분투 중인데, 여성들의 소비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몸 꾸미기에 열을 올린다.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자들의 옷도 여성들의 그것에 맞춰 부쩍 섹시해졌다. 대체로 몸에 착 붙어서 몸매를 강조하는 옷들이 유행 중이다. 특히 수트는 눈에 띄게 슬림해졌다. 몸에 쫙 붙은 수트가 유행이어서 통 넓은 바지, 어깨에 솜을 넣은 자켓 등은 아버지에게도 어색하게 됐다. 이와 함께 남자들의 옷도 여성이 그것만큼이나 자극적인 멋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 상태다. 결혼식 날이나 매던 보타이의 유행, 광택나는 원단으로 지은 수트, 부분적으로 스티치를 넣은 것이라던가, 버튼에 보석을 박은 셔츠 등이 그것이다.

여자들이 미끈한 다리를 위해 털을 밀고 있는 반면, 남자들은 남자다운 턱을 위해 털을 기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매끈한 것이 매력인 여자는 더욱 매끈하게, 털털한 것이 매력인 남자는 더욱 ‘털털’해지고 있는 것이다. 불황이 심하면 심할수록 경쟁도 심해지는 법, 그래서 여자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남자들은 슬림한 수트에 보타이를 매고 유혹하는 것이다.

사람들만 이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건들도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만의 매력을 만들고 있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다. 레이벤의 보잉 선글래스처럼 그 브랜드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추억으로 돌아가서 독보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 루이비통의 스피드 백처럼 자신의 로고를 여기저기 프린트하는 것을 넘어 예술가들과 함께 새롭게 작업하는 것, 크리스찬루부탱 하이힐처럼 힐의 바닥을 붉게 칠하는 것, 그래도 자신의 매력이 없다면 삼성 노트북처럼 엠블럼이라도 크게 쓰는 것 등이다.

 


브랜드의 자랑을 전면에
전자제품에서는 전반적으로 브랜드 엠블럼의 크기가 커지는 가운데, 각 브랜드의 고집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붙이고 있다. 처음부터 좌우로 날이 왔다갔다 하는 면도방식을 썼던 브라운은 지금도 그 방식을 쓰고 있고, 처음부터 빙글빙글 도는 면도 방식을 썼던 필립스는 회전날을 머리에 붙인 면도기를 여전히 팔고 있다. 브라운은 최근 음파 방식이라는 걸 내걸어 더욱 빠르게 왕복운동하는 면도기를 개발했고, 필립스는 세 개의 회전날을 머리에 붙이고 목이 자유롭게 꺾이는 면도기로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자신이 잘 만드는 면도기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서 양대 산맥을 이끌어 가는 형국이다.

꽤 괜찮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니콘이나 캐논에 번번이 밀렸던 올림푸스 카메라는 마이크로 포서드라는 방식의 소형 렌즈 교환식 카메라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필름 카메라가 유행하던 30년 전에도 올림푸스는 소형 렌즈 교환식 카메라로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모토로라는 아직도 폴더식 휴대폰을 고집하고 있고 애니콜은 슬라이드 방식이 최고라고 말한다. 모두 자신이 갖고 있는 기술(매력)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불황 속의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있는 모습이다. 앞에서 말한 섹시한 남녀들처럼.

 


자신만 할 수 있는 장점을 찾아라
자동차는 브랜드 만의 장점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럽 브랜드가 장인정신을 기본으로 브랜드 키우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미국 포드, 크라이슬러, GM은 원가절감을 모토로 규모의 경제에 집중했었다. 그렇게 2009년이 됐고, 브랜드가 강한 유럽차가 전 세계를 휩쓰는 반면, 1천 년은 끄덕 없을 것 같았던 미국 빅3는 차례대로 넘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크게 대성한 아우디는 커다란 싱글 프레임 그릴을 앞에 붙이고, 더욱 정교한 사륜구동 시스템과 말끔한 디자인으로 홀로 성장하고 있다. 반면 주인이 바뀌고 회사 이름까지 바뀔지 모르는 GM은 내세울 것이 덩치 밖에 없다. 그나마 성공한 미국인을 말해줬던 캐딜락의 각진 얼굴이 머리 속에 남을 뿐이다.

일본 브랜드의 성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들은 세심한 것을 잘 만드는 국민성(말하자면 일본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적극 살려서 세심하게 배려한 자동차를 만들어 성공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니, 파나소닉, 아이와 등이 건설한 전기-전자 기술 인프라를 자동차에 적극 접목하여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엔진-전기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전 세계에 팔고 있다.

 


이제 정리해 보자
불황 속에서 여성의 스커트가 짧아지는 건 무엇이라고? 맞다. 여자들만 할 수 있는 매력을 더욱 자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으로 이해하는 거다. 남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도 남자들만 할 수 있는 남자들의 매력으로 보면 된다. 불황 속에서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장점을 더욱 자극적으로 디자인하고 있다.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당신의 회사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점은 무엇인지. 아무런 장점이 없다면 일단 엠블럼이라도 크게 붙이고 보자.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물려줄 당신 회사만의 장점을 차근차근 만들어 보는 거다.

 

장진택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졸업, 한 때 기아자동차 디자이너, 한 때 월간 [디자인] 기자, 한 때 [모터트렌드] 기자,  지금 [GQ]기자. 참 많이 옮겨 다녔고, 조만간 회사를 또 옮길 예정이데, 이번엔 정말 오래 다닐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기자라서 디자인 칼럼을 거의 쓰지 않는 가운데 [한겨레] 신문에 '디자인 옆차기'라는 이름으로 다소 삐딱한 디자인 비평 칼럼 비슷한 것을 쓰고 있다.
| 디자인DB (www.design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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