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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디자이너라면..

[2007.10] 머리를 말하고 가슴을 담는 글씨...한글 캘리그라피

kimdirector 2021. 1. 8. 14:52 

머리를 말하고 가슴을 담는 글씨...
한글 캘리그라피

붓을 들고 흘려 쓴 듯 멋스러운 필체들이 가득한 일상의 풍경. 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메커니즘에 쭉쭉 배어나오는 그 모습들은 결코 우연의 조합이 아니었다. ´캘리그라피(Calligrapy)´ 가 뿌리 내리고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에디터 강신재

우리에게 ´한글´ 이 무엇이던가. 좁게 생각하면 ´우리의 나랏말´ , 거창하게 얘기하면 ´가꾸고 계승해야 할 세계 문화유산´. 그 정도의 의미를 벗어난 적이 없다. 가슴을 열고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딱히 새로운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없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상을 이어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것이 일상에서 꿈틀대고 있는 상황 역시 낮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한글의 서체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고, 거기에 세련됨까지 더해졌다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까.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최근에 본 영화 포스트, 제품 포장지, 북 커버, 간판 등을 떠올리면 되겠다. 누군가가 붓을 들고 흘려 쓴 듯한 멋스러운 필체들이 가득한 일상의 풍경. 펜으로 꾹꾹 눌러쓰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디지털 메커니즘에 쭉쭉 배어나오는 그 모습들을 결코 우연의 조합이 아니었다. ´캘리그라피´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서예와 디지털의 만남

´캘리그라피´ 라는 용어로 상황을 압축했지만, 특별한 제재없이 통용되고 있는 이 단어가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캘리그라피는 일반적으로 ´서예´ 라는 말로 번역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캘리그라피는 순수 서예와는 거리가 멀다. 붓과 먹, 화선지 등을 이용해 글씨를 쓰는 과정이 포함돼 있긴 하지만, 기대하는 것은 글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디자인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심은 ´서예를 응용한 디자인´ 이다.

이 같은 캘리그라피 중에서도 최근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은 한글 캘리그라피다. 디자인계 내부에서는 한글 글자 수가 영문에 비해 적은 데다 그 형태 또한 다양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그 탓에 한글 글꼴은 그동안 폭넓게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제한된 한글 폰트를 넘어서려는 시도들이 조금씩 전개 되기 시작했다. 개성 가득한 부정형의 손글씨 역시 그 시도 중의 하나였다.

한글 캘리그라피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틀을 깨뜨리고 물 흐르듯 써내린 손글씨는 무엇보다 생각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듯 보였다. 상품에 이용된다면 어쩔 수 없이 복제를 견제할 수밖에 없지만, 특정 캘리그라피는 한 주제에 가장 충실한 유일무이의 작품과도 같았다.

굳이 문자 해석을 통해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지 자체로 주제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감성가지 표현할 수 있었다. 특히 붓의 굵기감, 먹물의 번짐, 계절의 느낌 등을 상황에 다라 달리 표현하면서 형태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 특징.

캘리그라피 전문회사인 ´캘리디자인´의 이규복 실장은 "캘리그라피는 서예와 디지털의 만남, 즉 전형적인 디지로그" 라며 "서예가 가지고 있는 감성과 일회성, 작가정신이 디지털 기술과 만나 캘리그라피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콘텐츠와 비주얼 모두 글씨로 표현한다

캘리그라피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시점이 언제일까. 사실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지난 6월 ´서예의 실용화에 대한 다각적 탐구´ 를 주제로 열린 한국서에학회 춘게학술발표회에서 원광대 서예과 김수천 교수는 "감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오늘날 서에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며 "과거의 서예는 일상의 문서와 물건들 속에서 자유자재로 표현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고 말했다.

최근의 캘리그라피 붐이 소위 ´실용서예´ 의 전통을 잇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의 반증이다. 굳이 서예의 역사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2000년 이전에는 디자이너가 직접 붓을 잡고 손글씨를 제작하기도 했다. 광고디자인이나 포장디지인에서 전통의 컨셉트를 강조하거나 신토불이 제품을 홍보하고자 할 때 주로 붓글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자인´ 의 관점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1세기 들어오면서부터다. 업계에서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취화선>(2000) 등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시작으로 책표지 디자인, 간판 디자인, 포장지 디자인, TV 타이틀 등으로 차츰 번져 나갔다. 2006년 현재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SKTelecom 신문광고), ´산사춘´(배상면 주가 TV CM), ´신씨화로´(화로구이전문점 간판디자인) 등이 모두 캘리그라피의 한 예다.

완선된 결과물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됐지만, 상품의 콘텐츠와 비주얼을 동시에 살리면서 그 느낌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은 같았다.<웰컴투 동막골> 의 경우 포스터 비주얼에서 보이는 배우들의 익살맞은 표정들과 글자의 재미감이 같은 수위에서 조절되고 있다. 캘리그라피 전문회사 ´필묵´ 의 김종건 대표는 "´웰´ 자에서 ´ㄹ´ 의 방향을 바꿔서 표현하는 엉뚱함, ´컴´ 자의 ´ㅁ´ 을 크게 표현한 재치가 영화의 느낌을 대변하고 있다" 고 말했다.

최근에는 이에 머물지 않고 각종 생화용품과 패션 등에 응용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필묵´ 은 엽서, 포장봉투는 물론이고 시계, 머그잔, 그릇, 의자 등에 캘리그라피를 접목한 상품들을 잇따라 선보였다. 글자 자체의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제품의 분위기나 컨셉트와 조화로운 글자 문양이 돋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시계의 캘리그라피에서는 흐르는 시간의 이미지가 묻어나고, 소파의 캘리그라피에서는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수놓은 무늬가 연상된다.   

특히 패션디자이너 이상봉 씨는 지난 2월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 화가 임옥상, 소리꾼 장사익 씨의 필체를 패턴화한 ´한글 의상´ 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까만 먹으로 흘려쓴 글씨체는 블랙과 화이트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의상 컨셉트와 맞아떨어져 전세게 의상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문방사우와 컴퓨터, 이제는 문방오우

일본의 경우 캘리그라피가 일상에 파고든 예가 상당하다. 각종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건물 전면 인테리어를 손글씨로 이룬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한글´ 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앞세워 도약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캘리그라피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문방사우에 컴퓨터를 더한 ´문방오우´ 시대가 열였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흘러나올 정도다.

김종건 대표는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자국어 캘리그라피 활용 정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학게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이론적 연구를 병행하는 것은 우리나라뿐" 이라며 "지금과 같은 관심이 이어진다면 머지않아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캘리그라피 폰트 개발 연구도 지속하며 관련 업계의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윤디자인연구소 등의 서체 개발 전문 회사는 한글 캘리그라피 폰트를 지속적으로 개발하면서 디지털 글씨에 손글씨 맛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캘리디자인은 직접 손으로 쓴 16,000자의 글자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캘리그라피 폰트의 온라인 판매 루트도 개척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문제도 있다. 손글씨도 사고팔 수 있다는 인식이 미미해 저작권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하는 것. 포스터 제작업계 등에서 서예가의 글씨를 무단으로 도용해 문제가 일어난 경우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법정 분쟁으로 치달아 문제가 커진 경우, 개발자측과 도용자측이 합의를 봐서 블법행위가 묻혀진 경우 등 관련 사레도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으로 볼 수 있는 만큼 그에 합당한 저작권이 보호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KTX 매거진 2007년 10월 호 문화기획 기사(에디터 강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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