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천천히 걷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지나쳐 온 것들을 눈에 담으며 걷습니다.

Topic/디자이너라면..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kimdirector 2021. 1. 8. 14:47 

오창섭 저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디자인 낯설게 보기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 내는 일부터 도로의 교통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까지, 오늘날 우리 생활에서 디자인이 관여하지 않는 분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일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그들은 공간을 설계하고 영상을 편집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심지어 조각까지 한다. 또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설계하고, 인쇄를 다루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듯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물들의 성격 또한 바뀌고 있다. 인공 지능을 갖춘 가구와 주거 공간, 갈수록 정교해지는 도시 시스템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한 제품부터 도무지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의 환경은 점점 낯설어지고 있다.

이번에 세미콜론에서 출간한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서 온 디자인을 통해 다가오는 시대를 읽는 키워드를 제공한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 뒤에 숨겨져 있던 디자인의 의미를 통해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온 모든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컴퓨터에는 마우스와 키보드가 있어야 할까? 디자인이 정말 인간을 위한 걸까? 흔히 말하는 ‘굿 디자인’은 과연 누구에게 좋은 디자인일까? 누가 왜,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굿 디자인이라고 말하는가? 디자인 낯설게 보기. 저자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다. 낯섦을 포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모든 구속과 고정된 틀을 벗어날 것을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를 읽는 키워드

 

1장 첫 번째로 낯설게 볼 키워드는 ‘인터페이스’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해 온 버튼과 키보드, 아이콘 등이 실은 인간의 풍요로운 삶과 디지털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그는 현재의 인터페이스가 이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역사적인 과정을 추적하며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그저 화려한 버튼과 아이콘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는 현실을, 협소한 인터페이스가 우리를 삶의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2장 두 번째로 낯설게 볼 키워드는 ‘모던 디자인’이다. 19세기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르누보와 미국의 1세대 디자이너들, 그리고 바우하우스로 이어지는 모던 디자인의 계보는 오늘날 하나의 공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영웅담과 전설이 저 멀리 바다를 건넌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유일한 디자인의 역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논의되어 온 여러 가지 디자인사의 가능성과 문제점들을 열거하며 다양한 역사의 흐름을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추고 암기하듯 배워 온 디자인의 역사 서술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3장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한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디자이너가 실천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부르짖은 디자인계의 사도 빅터 파파넥의 책에서 따온 키워드이다. 민주화항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1980년대, 시대의 분위기와 맞물려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빅터 파파넥의 명제는 우리나라 디자인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정작 파파넥이 청중이길 희망한 미국의 디자인계는 전혀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반면, 소위 그가 말한 소외받은 제3세계 국가의 디자이너들만 열광한 희극적인 상황을 꼬집는다. 특히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무시한 채 디자인의 사회적인 역할을 디자이너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야말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조건을 다시 되새기게 한다.

4장 흔히 말하는 ‘굿 디자인’이 말 그대로 좋은 디자인을 의미하는지에 의문을 표한다. 저자는 제도화된 ‘굿 디자인’이 디자인에 가하는 폭력을 ‘절대적인 폭력’이라고 말한다. 단지 존재함으로써 누군가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폭력. 아무리 자신은 굿 디자인에 관심이 없다고 말해도 굿 디자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디자인들은 배경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사례를 통해 굿 디자인의 기준이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음을 보여 주며 누가, 왜 그것을 굿 디자인이라고 말하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5장 의자의 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성격이 바뀌는 공간, 반대로 공간의 변화에 따라 성격이 바뀌는 사물 등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똑같은 계단이 아이에게는 놀이의 수단으로, 노인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애물로 바뀌는 등 경험 주체에 따라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머리로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을 몸이 기억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등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평소 알고 지내던 공간이 낯선 곳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6장에서는 광고는 물론 대학교 간판에도 여기저기 등장하는 ‘과학’이란 키워드를 통해 디자인 분야에 팽배한 키치적 행태를 꼬집는다. 저자는 설문조사, 포커스 그룹, 인체측정 수치 등 수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사용자가 실은 과학이고 싶어 하는 디자인의 욕망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디자이너의 아바타에 불과함을 말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는 과학이 디자인에 던지는 의미를 짚어본다.

7장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사물의 쓰임, 즉 ‘사용’의 세 가지 측면을 이야기한다. 디자이너가 컵으로 디자인한 제품을 화분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디자인일까? ‘과정학파’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패한 디자인이다. 디자이너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한 사물의 용도란 사용하는 사람의 삶과 어우러져 창출되는 것이지 어떤 고정된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중 벨 전화회사에서 구체화된 쉐넌과 위버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비롯해 기호학에서 다뤄지는 여러 가지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사물이 사용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본다.

8장‘사물의 질서’는 분류 체계에 대한 키워드이다. 분류는 흔히 생각하듯 사물을 어떤 기준에 따라 무리 짓는 행위이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인식 체계이기도 하다. 저자는 램프가 된 우유병, 느림을 이야기하는 운송기기 등 기존의 분류 체계로 담아낼 수 없는 디자인 사례를 통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 이상 성질을 정의할 수 없는, 분류할 수 없는 사물이 늘어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9장에서 낯설게 봐야 할 단어는 ‘정체성’이다.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 문화의 정체성, 한국디자인의 정체성 등 우리는 흔히 어떤 대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정체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정체성이란 틀이야말로 우리 앞에 있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치가 아닐까? 앞서 살펴본 인터페이스, 과학, 공간 등의 키워드들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키워드를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저자가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 틀에 갇혀 버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정체성’이란 키워드야말로 익숙한 질서를, 기존의 시스템을 깨기 위해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디자인을 꿈꾸며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늘 입던 옷, 오랫동안 살아 온 집, 손때 묻은 물건들...... 이들은 우리에게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익숙한 상징체계 내에서 세상을 살아간다. 바다는 파란색이다, 자동차 바퀴는 네 개다, 신호등이 빨간 불일 때는 멈춰야 한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 이러한 공통된 인식 체계가 없다면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때로 우리의 눈을 가려 새로운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창의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예술가나 디자이너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아홉 개의 키워드를 통해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디자인에 대한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무언가에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넉넉하게 담아낼 수 있는 그릇. 이제 막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한 디자인학과 학생들에게, 클라이언트와의 줄다리기에 지쳐 버린 현직 디자이너들에게, 그리고 사물의 이면에 숨어 우리의 삶을 이끄는 디자인의 작동 원리를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은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넓혀 주는 더없이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반응형
이전보기 카테고리 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