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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디자이너라면..

디자인: 물질에서 디지털로, 그리고 그 역으로 -박해천

kimdirector 2021. 1. 1. 15:05 

지난 40여년 동안 '디자인'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였고, 그것은 디자인 담론의 핵심적인 쟁점들의 변화에 반영되었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50년대에는 생산성, 합리화, 규격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헨리 포드가 제시한 산업 생산은, 한편으로는 디자인을 순수 및 응용 미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체로 하여금 디자인을 새로운 규범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해준 모델이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복구 시기에 유럽에서 점차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거기에는 재화의 생산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있었고, 그것은 적정 가격의 소비 상품을 시장에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대량 생산에 의해 충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디자인이 주로 제품의 차별화를 의미하게 될 때까지 그런 시기는 오지 않았다.


디자인에 대한 이러한 핵심 쟁점과 더불어, 디자인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지금은 고전이 된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저작, <형태 통합에 관한 소고Notes on the Synthesis of Form>가 출판된 1964년이었다.


디자인 담론의 세번째 쟁점은 디자인과 과학의 연관성이었다. 이때 과학은 자연 과학, 사회 과학, 인문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디자인이 경영 및 마케팅 담론의 영역에 접어든 최근까지, 이에 대한 논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술 지향적 기업체와 라틴 아메리카의 일반 기업체들에서 디자인은 아직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기업 경영, 기획, 엔지니어링의 전통적인 규준들 너머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또한 '현실 사회주의' 경제 내부의 기업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을 엔지니어링의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시도는 이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리 놀랍지 않은데- 디자인이 그저 제품 개발 부서에서 제안한 설계 청사진에 장식을 입히는 화장술에 불과하다는 평결로 끝을 맺었다. 이러한 편협한 관점은 아직도 수많은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에서 발견된다. 거기에서 디자이너가 기여하는 바는 그저 스크린을 디자인하고 자극적인 시각 효과를 덧붙이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 생산이 엔지니어링의 범주 안에서 인식될 때, 디자이너는 그저 메이크-업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스케치 및 시각화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림 그리기가 아니다. 디자인은 사유이며, 그래서 인식 과정이다. 이 점에 대한 강조가 중요한데, 일반 대중들은 디자인 하면, 그림 그리는 능력을 연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화장술에 대한 문제는 디자인 담론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다. 50년대에 막스 빌Max Bill은 자신이 디자이너를 헤어드레서로 보는 관점이라고 부른 것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한 표현이 지니는 부정적인 의미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디자인은 피상적이며, 부차적인 중요성을 지닐 뿐이며,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약간 다른 분위기를 풍기긴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미학적 측면-외관과 형태-을 디자인의 근본적인 요소로 인식하려는 경향에 남아 있다. 여기에서 모든 주제들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둘러싸인 예술적 디자인의 층위로 급상승한다. 자신이 진정 무엇을 행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창조적 개성이라는 안개에 휩싸인 스크린 뒤로 몸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행위가 그러한 환원주의적 유행으로 해석된다고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자신이 행한 디자인의 유해한 결과들이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거의 모든 기업체의 생존 여부가 이들이 행한다고 가정되는 화장술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디자이너를 엔지니어에 의해 개발된 기술 구조물의 외형을 포장하는 전문가이라는 관점을 대신할 수 있는 좀더 차별화된 접근이 유용할 듯 하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의 존재론적 다이어그램이다. 이 다이어그램은 핵심 범주에 의해 서로 연결되는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 첫째, 우리에게는 효과적으로 행위하기를 원하는 사회적 대리인 혹은 사용자가 있다.
  • 둘째, 우리에게는 사용자가 수행하길 원하는 임무가 있다. 빵자르기, 락 음악 듣기, 맥주 마시기 혹은 치아에 근관 만들기 등등.
  • 세째, 우리에게는 행위의 대리인이 이러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 혹은 인공물이 있다. 빵 자르는 칼, 워크맨, 맥주컵, 20,000 rpm으로 회전하는 정교한 드릴 공구.

 

그러면 이제, 이러한 세가지 이질적인 영역-신체, 목적을 지닌 행위, 인공물 혹은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정보-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차례이다.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바로 인터페이스이다. 인터페이스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육체, 도구, 특정 목적을 지닌 행위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차원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물질적 인공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학적 인공물, 이를테면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정보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것은 디자인의 본질적 영역이다. 이러한 입장은 디자인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그 물질성을 몰아 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인터페이스는 물질성/비물질성의 이분법을 넘어서며, 이 둘이 공통적으로 지닌 것을 감싸 안는다. 그것은 피부 질병을 진단하기 위한 의료 소프트웨어를 포함하듯이, 스패너의 디자인도 포함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는 디자이너가 주목하고 있는 핵심 영역이다. 인터페이스의 디자인은 제품 사용자의 행위의 범위를 결정한다. 인터페이스는 도구로서의 대상의 특성과, 데이터에 담겨진 정보를 표현한다. 그것은 대상을 제품으로 만들며, 데이터를 이해가능한 정보로 변화시킨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present-at-hand와 대립되는 것으로 ready-to-hand를 만들어 낸다. 제도용 압핀, 가위, 여행용 정보 키오스크, 이 세가지 사례들은 인터페이스가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신체는 손쉽게 관통될 수 있는 예민한 막으로 둘러싸인 부드러운 덩어리들로 구성된다. 제도용 압핀을 사용하려면 그 압핀 머리에 엄지 손가락으로 누를 수 있도록 표면 처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제도용 압핀을 사용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상이 두 개의 날카로운 날을 지니게 될 때, 그것은 가위라고 불리우는 사물이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시킨다. 그 날들은 도구의 효과적인 부분이라고 칭해진다. 그러나 이 두 날들이 '가위'라는 인공물로 탄생하기 이전에, 그것은 손잡이 부분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신체의 활동적인 두 부분과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손잡이가 부착될 때서야 그것은 한짝의 가위가 된다. 인터페이스가 도구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번째 사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로부터 출현한 것인데, 그 영역은 '인터페이스'라는 용어 자체가 탄생한 곳이며, 인터페이스의 기능과 그 디자인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한다. (하드 디스크나 CD-ROM에 저장된) 디지털 데이터는 O과 1의 형태로 코드화되고, 사용자와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 시각적인 차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찾기'나 '탐색'과 같은 기능이 메뉴 디자인, 스크린 상의 위치 설정, 색채 조명, 서체 선택 뿐만 아니라, '찾기'나 '탐색'과 같은 기능의 제공 방식까지 포함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없다면 특정 데이터나 행위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다시피 암호 명령어로 작업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첫 세대가 사용한 암호 명령어는 너무 어려워서, 결국 디지털 제품 또한 사용하기 편리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자-친화적'이라는 용어가 고안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사물일 뿐이거나 비-사물에 불과했다. 그것은 단지 ready-to-hand가 부재하는 present-at-hand이었을 뿐이다.


인터페이스가 없으면 도구도 없다. 이 사실은, 인터페이스를 디자인에 대한 해석을 위한 핵심 범주를 제공해 준다. 인터페이스가 내포한 쟁점들은, 디자인을 미학과 연관시키려는 문화 지향적인 해석을 압도한다. 이전 디자인 담론의 지배적 주제들을 약간 단순화시켜 논의해보도록 하자. 1960년대의 소비 사회와 소외에 대한 급진적 비판은 대안적 디자인에 대한 희망에 힘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지금은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현실 사회주의'라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정의되곤 하는 계획 경제의 토대 아래 디자인의 가능성과 새로운 제품 문화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기준들에 의해 조직화된 사회가, 다양한 물질 문화, 소비에 대한 중독 없이 소비를 행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들렸다.


80년대 이래 정치적 과정은 이러한 관념에 종말을 고하는 듯 보였다. 계획 경제의 제품 문화는 시장 경제에서 생산된 상품들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다. 정부 기관에 의해 디자인이 진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을 산업에 통합시키는 것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것은 생산 과정에서 정량적 기준들이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디자인과 혁신을 생산의 정상적 흐름을 뒤흔드는 외적 활동으로 여겨온 계획 담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70년대의 논의에서는 적절한 테크놀로지에 관한 주제들이 다루어졌다. 더 나아가 처음으로 '좋은 형태'에 대한 유럽-미국 중심적인 개념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종속 이론'에 근거한 논의를 통해 제3 세계 국가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디자인 개발을 주장하고 나섰다. 중심부과 주변부 국가 사이의 사회-경제적 차이가 재인식되고 수용되자, 역으로 이것은 서구로부터 유래한 디자인에 대한 보편적 정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국가들 간의 관계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것은 국민 총생산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산업화의 역효과로, 중심부 국가의 소비 패턴에 물든 소수와 주변화된 다수 사이의 격차는 확고해져 갔다. 주변부 사회 내부의 이러한 현격한 격차는 불가피하게 주변부에서의 디자인에 관한 논의에 정치적 경향을 부여하였다.


중심부의 국가에서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주변부에서 디자인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다. 그것이 기술적 혹은 전문 직업적으로 다루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정치적 요인의 지배는, 주변부에서의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정치화되었고,-보다 안좋은 경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중심부 국가에서 발견되는, 외형상 비정치적이며 고고하게 중립을 지키는 듯 보이는 태도는 순진하거나 냉소적으로 보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부르짖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메리칸(소비) 드림의 성전 참배에 몰두하는 모습은 모순적이다.


디자인과 관련한 주변부 국가의 태도는 종종 모호해 보인다. 중심부의 선진 국가가 성취한 디자인의 기술적 특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바람직한 디자인의 참조 대상 혹은 모델-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로 작용한다. 그러나 프로세스와 마무리에 대한 기술적인 노우하우의 부족은 단순히, 디자인의 실제 생산물이 특히 형태나 미학적 측면에서 이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거듭되었다. 그것은, 거의 제대로 인식되지 않으나 주로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열정적 탐색으로 귀결되곤 했다. 이것은 종종, 식민화 기간 동안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들의 형태적 약호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결합되기도 한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그냥 디자인하는 건 어때?"라고 말이다. 제3 세계 민족주의의 낮은 목소리는 간결하면서도 아이러니컬한 결론을 유도할 수도 있는 데, 그것은 민족주의란 가난한 자들에게 남겨진 최후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접근은 정체성과 존엄성의 연결 고리를 간과한다. 정체성에 대한 탐색은 독립에 대한 바람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자기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스스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80년대에 들어,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좀더 정확하게는 기능주의의 캐리커처에 대한 비판이 다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활동을 개시했다. 개성의 몸짓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질문은 희미해져 갔고, 스타일과 형태에 대한 논의가 다시 디자인계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자인 사물은 숭배 대상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소규모 생산의 신-공예 제품들이 예술 시장의 가격 수준으로 특히 가구나 조명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슬로건은 디자인이 무엇보다도 먼저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비자는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인 전리품의 전시회를 통해 알려진 라이프스타일을 구입했던 것이다.


90년대 현재, 환경과의 공존 가능성과 디자인 경영이 디자인 담론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 주제는 더 이상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이며, 이것은, 지역에서 활용 가능한 기술적 및 재정적 원천들을 고려하여 다양한 국가들의 필요에 부합하는 발전을 성취하고자 했던 '전유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70년대적 주제들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율적으로 유지되는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은 권장 사항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심부 국가가 자신들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그리고 채무 국가가 실패한 축적 과정의 기간 동안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정기적으로 상환하는 만큼이나 오랜 동안, 주변부 국가는 자신만의 관심사를 정립하여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가 혁신의 역동적 요인 없이 이해되고 실행된 결과, 그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디자인 출판물과 매체들이 다루는 범위로 판단컨데, 이러한 주제들은 이제 집중 조명의 포화 속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그 이전까지 기업과 국가 경제의 효율성에 대한 논의에서 디자인이 주요 결정 요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디자인'이라는 표현의 널리 수용된 용법과 이론적 기반의 결핍 사이의 모순을 노출한다. 오늘날 디자인은, 이론적인 성찰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는 일종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 우리의 경제 속에 그것이 편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이론적 연구에 대한 결핍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최종적인 답변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디자인 담론의 얍삽함과 엄격한 이론의 결핍 간의 상호 작용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제껏 디자인은 적절한 기반을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화는 단지 '자질구레한 대화'에 그쳤을 뿐이다.


디자인에 대한 재해석은 평가 참조물로서의'좋은 형태'라는 틀과 그 본질적인 사회-교육학적 목표를 넘어서는듯 보이는데, 이는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성취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해석은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을 뛰어넘는데 그 개념에 의하면, 디자인이 단지 잠재적으로 취득 가능한 사물들의 시나리오 속에서 상호 교환가능한 품목들을 제공해주는 기능을 할 뿐이다. 디자인에 대한 재해석은 여기에서 디자인에 대한 일곱 테제의 형태로 제시된다.

 

  • 테제 1: 디자인은 인간 지식과 실천의 어떤 장에서든 표현될 수 있는 영역이다.
  • 테제 2: 디자인은 미래 지향적이다
  • 테제 3: 디자인은 혁신과 관련된다. 디자인의 행위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다.
  • 테제 4: 디자인은 신체와 공간, 특히 시지각의 영역을 포괄한다.
  • 테제 5: 디자인은 효과적 행위를 촉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테제 6: 디자인은 평가의 영역에서 언어에 따라 규정되는 위치를 지닌다.
  • 테제 7: 디자인은 사용자와 인공물-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물이든 소프트웨어든 간에- 간의 상호작용과 관련된다. 디자인의 영역은 인터페이스의 영역이다. 

 

디자인을 인간 행위의 영역으로 정의하는 첫번째 테제는,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라는 표현을 통해 연상되는 규범의 협소한 틀, 이를테면 산업디자인, 그래픽디자인,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등로부터 디자인이 벗어나도록 만든다.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는 식의 모호한 일반화의 함정에 빠질 위험도 존재한다. 모든 것이 디자인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인 것도 아니다. '디자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하고, 새로운 사회적 실천의 창조를 통해 일상 생활에서 표현될 수 있는 잠재력을 함축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에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 활동의 대상이 되는 영역은 언제나 명확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기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기업가나 경영자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항에서 짐 배송의 착오를 줄이기 위해 프로세스를 재조종하는 시스템 엔지니어는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 영향에 저항하는 다양한 변종 옥수수를 개발하는 유전자 엔지니어도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의 내재적인 요소들은 오로지 물질적 제품에만 관련될 뿐만 아니라, 서어비스의 차원까지 포괄한다. 디자인은 그 모세 혈관의 분맥들이 모든 인간 행위를 관통하는 기본적 행위이다. 어떤 전문 직업도 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미래는 바로 디자인이 속해 있는 영역이다. 디자인은 확신과 희망이 결합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미래 전망에 대한 불신, 곧 단념의 처소에서는 어떤 디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혁신'과 '디자인'이라는 표현은 서로 부분적으로 겹쳐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동의어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하건데, 디자인은 사용자 집단의 문제에 주목하는 특수한 형태의 혁신 행위이다. 혁신의 요소를 지니지 않는 디자인은 명백한 모순일 뿐이다. 그러나 혁신 행위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디자인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는데에는 역부족이다. 이런 이유로 concern의 개념이 도입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윤리학과의 연결 지점을 마련한다.


모든 디자인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인간의 신체라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서 지각 공간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인간은 무엇보다도 눈을 지닌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도구의 경우-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간에- 디자인의 임무는 인공물을 인간의 신체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 과정은 '구조적인 접촉coupling'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될 수 있다. 디자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형태','기능','스타일'이라는 개념들을 사용한다. 디자인을 이러한 개념들과 연결시키는 대신에, 디자인을 효과적 행위의 영역 내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다. 왜 제품이 발명되고 디자인되고 생산되고 유통되고 판매되고 구입되고 사용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제품은 바로 효과적 행동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특정 행동을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기준들을 명확하게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학자에게 립스틱은 일시적으로 문신을 새기기 위한 도구이며, 그것은 우리가 매력이나 자기-표현이라고 부리는 사회적 행위 패턴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효과성을 판단하는 기준들은 출판 편집, 콘서트 포스터, 토목 공사에 쓰는 불도저 등 적용 대상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하나의 제품이 특정한 행위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가치 기준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효과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페이스의 개념은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이 둘 다 디자인의 학문 분야라는 전제 하에서 이 둘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디자이너는 사회-문화적 효율성에 주목하여 사용에 관련된 현상을 관찰한다. 엔지니어링의 범주들은 사용자의 기능성을 포괄하지 않는다. 엔지니어는 물리적 효율성에 근거하여, 정교한 과학적 수단에 의지해 이에 접근한다. 그러나 디자인은 블랙박스의 테크놀로지와 일상 생활의 실천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

 

Photo by Cathal Mac an Bheath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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