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천천히 걷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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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ic/기획자라면..

기획이라는 직군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kimdirector 2021. 1. 20. 17:02 

1. 이 의문은 2011년 2월부터 시작되었다.
급작스럽게 합병이 되면서 회사에는 일전에 보지 못했던 기획자들과 한 팀이 되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일을 함께 하던 사람들과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 때 그 시점에는 단순히 느낌만 그러했다. 그 때는 이제 겨우 회사생활을 시작한지 반년 정도 되는 시점이라 정확히 그 이질감을 확고한 단어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워서였다. 그 이상한 부분이 확실시된 부분은 명함을 새롭게 파기 위해 영문으로 부서명을 이야기할 때였다.

 

"기획팀이 영어로 뭐에요?"

"글쎄. Planning Team ?"

"에이. 모냥빠지게 플래너는 좀 그르타. 스케쥴러도 아니고."

 

일정만 입에 달고 살기 때문에 플래너,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쭉 기획자의 정확한 정의는 Plan 이라고 하는 심플한 단어로 가두기에는 좀 다채로운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명함을 새로 만들기 전에 만들었던 명함에는 Service Design Department 라고 박혀 있었다.

 

 

2.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의문점이 두번째 든 시점은 같은해 8월쯔음이었다.

잦은 조직개편으로 이번에는 개발자의 팀에 속해 기획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 때에는 개발 진행상황에 대한 가이드와 기획서를 쓰는 작업을 했다. 어쩐지 그 때에 하게 된 기획자의 임무, 기획자가 하는 일 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그저 우리가 키노트, 피피티로 된 기획서를 찍어내는 사람일까' 라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개발자가 하고 싶은 방향을 듣고 정리해서 기획서로 주고 체크해주는 역할로 변해버린 느낌이 있었다.

 

"내 생각엔, 주니어 개발자는 뭐 모듈 하나 띄어서 주든지 할 수 있는데, 주니어 기획자는 솔직히 쓸모 없는 거 같아."

 

그러게요. 주니어 기획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다지 없을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시니어 기획자가 있기나 할까. 이 때도 기획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풀지 못했다.

 

 

3. 2013년, 세 번째로 기획자의 정의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생겼다.

일을 시작한 지는 햇수로 꼬박 2년을 채우고 몇 달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첫번째 의문을 가졌던 시기에서는 정확히 2년이 되었다. 동갑내기 사장님은 기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과외를 해보세요, 라고 지령을 내렸다. IT업계에 익숙하지 않은, 이런 분야는 처음 접하는 본부장님에게 과외를 하세요, 라고 뚝 떨어진 일거리가 생겼다. 한 달 간 기획에 대해서 파악하게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머릿속은 기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을 하게끔 복잡하게 돌아갔다. 여전히 스스로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을 내린 적이 없고 고민을 유예한 상태 그대로 2년을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실상 그런 어려운 문제를 던진 사장님 탓도 아니고, 이 터무니없는 과외를 받아야하는 본부장님 탓도 아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기획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하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정작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로 나는 알고 있을까.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남에게 가르칠 만큼인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졌다. 어쩌면 이번 한 달 간은 나 역시 '기획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기획은요, 선장같은 거에요."

그래서 그런 되지도 않은 과외가 시작이 되었다. 기획은 선장같은 거에요.

 

다른 무엇보다 신기했던 경험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주어진 타이틀이 기획자이기 때문에 같이 일을 하던 디자이너와 개발자 모두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시점은 출근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던 시점이었는데도, 그랬었다. 함께 일을 하던 사람들은 이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인데도 굳이 결론을 스스로 내고 정리하지 않았었다.

 

너의 의도가 뭐니, 네가 생각하는 방향이 뭐니, 이게 이렇게 해서 되면 어떻게 되는데,

 

 

 

쏟아지는 질문들 속에서 휑하니 띄워놓은 키노트 화면만 보고 나는 다시 또 망연자실 다시 해올게요, 만 연발했었다.  '랜덤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더 많은 규칙을 동반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던 그 때의 나는 기획서에 박아놓은 무책임한 '네 글자'의 무게가 사흘분의 고민거리였다는 것을 늦게 알았다. 기획서를 남들에게 보내기 전에 알았어야했고 수정했습니다, 라며 자꾸 휙휙 보내는 습관부터 고쳤어야 했다. 그나마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이 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느릿느릿한 내 속도를 기다려주었던 것.

 

그 때 들었던 말을 다시 기억해보면, 기획의도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해보라는 충고였다. 네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너는 알고 있어야 해, 라는 말은 당연한 일이다. 그 것을 실제로 코드를 작성해 만든 것은 개발자일 수 있어도 이 것이 어떻게 만들어져야한다는 상상은 모두 기획자가 하는 일이다. 상상을 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이 쪽으로 가야해, 라고 말을 하는 것이 기획자가 하는 일이다. 손을 뻗어 방향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기획자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짓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손짓을 하고 싶어서 기획자를 하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앞서 나가서 먼저 지시를 내리고 이리 가, 저리 가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하고 싶다,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나도 그러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무게를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선장이 가리킨 방향에 따라 몇 명의 팔이 움직이고 몇 명의 시간이 사용되고 몇 명의 노력이 들어가는 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처음 일했던 회사가 유독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이런 부분에 조금 민감하다. 내가 잘 못 쓴 기획서때문에 어린 아이는 아빠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잘 수 있고, 예정되었던 데이트에 나가지 못해 연인과 헤어질 수도 있다. 그 모든 문제가 급작스러운 게 아니라 내 손에서 파생된 문제일 수 있다. 그런 일은 좀 싫었다. 되도록이면,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 어떤 조합이든, 리더를 해본 적이 있나요?

- 밴드에서 드럼이 리드할 때와 베이스가 리드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 하나를 변경할 때, 그로 인해 움직여야하는 사람이 몇 명인지 회사에서 직접 세어 보세요.

 

 

기획은 상상하는 사람이다.

 

 

직군 중에서 따진다면 가장 상상을 많이 해야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가장 현실적으로 발바닥이 땅에 쫙 달라 붙어있는 사람들 중 베스트는 개발자이다. 실제로 맨땅에 놓고 구조부터 정하고 만들어 붙여 올리는 일을 하다보니 이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물론 이들 역시 자신이 만드는 영역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구현 가능한가' 를 중심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기획자가 하는 상상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비슷한 이유로 디자이너 역시 기획자보다는 조금 더 육지와 가깝다. 큰 모니터 전체에 포토샵을 띄운채로 정말로 눈에 보이는 화면을 만들고 세밀하게 잡다보면,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게 된다.

 

각자의 성향때문이라도 기획자는 다른 이들에 비해 상상을 많이 해야하는 입장이지만, 이에 더 추가하자면 아무 것도 나오기 전에 예외케이스까지 최대한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대해서 상상을 해야만 한다. 순방향으로 쭈욱 잘 진행되었을 때는 이 다음에 어떤 게 나와야 괜찮을까, 이 경우 문제는 없을까, 그리고 이렇게 진행되면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까. 보이지 않아도 생각해야 하고 보이지 않아도 상상해야 한다.

 

그래서 기획자는 상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기획자는 설계하는 사람이다.

 

- 고민을 좀 해보자.

- 어디까지 추상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나.

 

 

기획은 '이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참 정의가 많아지고 불어나고 있는데, 결국 기획자는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납득을 시키고 이 방향성으로 가야 하는 이유를 내놓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해당 프로젝트에 할당되어서 함께 일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획자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기면 그 둘은, 해줄 수 밖에 없는 것은 맞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말이 안 되는 것을 가져와도 못 해주지는 않는다. 기획자들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디자이너와 개발자는 일을 잘 하기 때문에 뭐가 되든 나오기는 한다.

 

그렇지만 이 부분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지, 이 방향을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처음에 자신이 상상한 대로 나오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 바퀴 쭈욱, 일을 또 하게 된다. 위에서도 말했는데, 내가 잘 못 쓴 기획서때문에 엄마아빠 얼굴 못 보고 잠자리에 드는 어린 아이가 생겨서는 안 된다.

 

일을 두 번 해야 한다는 것 말고 이유를 제시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점이 무엇이 있을까? 왜 이것을 해야하는 지 까닭을 모른 채로 함께 일을 하게 되면, 일이 진행되는 방향때문에 괜스레 뒤로 갈수록 스스로 '내가 하청업체인가?'라는 생각이 들게끔 이야기가 된다. 먼저 일을 해놓으면 '어랏,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라며 따지게 드는데, 그 의도에 대해서 명확히 전달하지 않으면 그 의도가 그게 아닌지 맞는지 뒷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할 수 있겠나. '이게 아니잖아' 라는 식의 대화가 지속되면 결국 실제로 정말로 손뻗어 만드는 사람들의 감정이 다치게 된다. 그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고작 기획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다. 의도와 이유를 아주아주 잘 정리해서 가져가는 수밖에 없다. 진짜로 만드는 건 기획자가 아니다. 만들어 주시는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있을 뿐이다.

 

그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어차피 사용자와 소비자도 설득 못한다.

 

- 지금 네가 말하는 그 의도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 듣나요?

- 만들어 놓은 문서를 보고 네가 왜 그렇게 해놨는 지 기억을 하고 있나요?

 

 

기획은 밥값을 해야하는 사람이다.

일본에서 쓰는 말 중에 이찌닌마에 (一人前)라는 표현이 있다. 딱 한 사람 분의 식사를 말을 하고, 이찌닌마에니스루(一人前にする)라고 하면 한 사람분의 일을 제대로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신입사원일 때부터 매우 묵직하게 들어왔다. 나는 이 곳에서 돈을 받고 있는데 정작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가. 정말로 하고 있나, 라는 의문이 자꾸 들면서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다.

 

이부분은 다른 챕터에 비해 현저히 짧을 것이다. 그저 저 단어가 중요하다. 남에게 일을 시키게 되는 입장에서 그저 명령하기에 익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정작 난 뭘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출근해서 퇴근시간까지 자리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일까. 그래서 매 순간 고민해야만 한다.

 

  •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고민이 내가 받고 있는 돈에 합당한가,
  •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나, 어딘가 더 좋아질 부분은 없을까,
  •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 개의 고민을 연달아 몇시간 정도 해보았나요.

 

 

기획은 망원경과 현미경을 가져야만 하는 사람이다.

빠른 속도로 줌인을 할 수도 있고 아주 빨리 뒤로 후퇴해서 전체 그림도 파노라마처럼 살필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굳이 망원경과 현미경을 들이밀었다. 그래도 그 수준이 천문대가 아닌 게 어딘가 하면서 미약한 안심을 하게 된다.

 

  • 사이트를 픽셀단위로도 볼 수 있어야 하고 전체 큰 구조에 있는 문제가 없는지,
  • 촘촘하게 클릭해서 봤을 때 빠지는 페이지가 없는지,
  • 혹시라도 사람이 그 구조에서 다시 뛰쳐나올 문을 안 열어놨는지를

 

모두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당연히 어렵다. 그리고 내가 못하는 영역이라 쓰면서도 뜨끔뜨끔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약하고 어디에 강한 지 미리 파악하고 있는 것부터 해보는 게 괜찮을 것 같다.

 

발레를 할 때 보면, 누군가는 뛰는 힘이 좋아서 다채로운 형태의 점프를 잘하는데, 다른 사람은 균형감각이 좋아서 턴만 잘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 무용수 수준까지 가게 되면 둘 다 잘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고급이 되기 전까지는 결국 신체 특징으로 인해 어느 한쪽이 더 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오래 하기 전에는 해결 안 되는 문제다. 뭘 잘하고 뭘 못하는 지만 알고 그 부분만 자꾸 신경을 써버릇하면 될 일이다. 궁극으로는 점프도 잘하고 균형도 잘 잡는 방향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 균형감각과 점프력 중 더 좋은 걸 테스트해보고 생각해보세요.

 

 

기획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사실 이 말은 입사했을 때, 사수와 있던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사람이 십년넘게 일하면서 느꼈던 정의가 이 말이었다.

 

"기획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지."

 

해결사인가. 그렇게 쓰기에는 타이틀로 너무 거창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으로 순화했다. 누누히 말하지만 IT업계에서 생겨나는 상당히 많은 문제들의 진짜 해결사는 개발자다. 기획자는 그 해결책을 제시만 한다.

 

 

 

오늘 하루도 문제가 자꾸 발생을 했다. 우선은 몇 분간의 자책의 시간이 있었다. 왜 미리 생각해보지 못했을까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하다.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인데도 왜 못했을까, 자책은 필요하지만 그 것만 가지고 수없이 시간을 끌 수는 없다. 대부분의 문제는 ASAP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인 탓이다. (급하니까 문제가 된다. 안 급하면 개선사항 정도에서 끝난다.)

 

그런데 문제를 던지기만 하는 사람은 기획자가 아니다. 단순히 강성사용자이거나, 혹은 관계자이거나 그저 직원이거나 CS일 수도 있다. QA에서 제시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각종 채널로 문제점은 들어오는데 결국 그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해결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이 기획자이다.

 

그렇기때문에 이 순간 기획자가 내놓는 말, 제시하게 되는 안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해결책이 되어야만 한다. 고민을 해보고 이 방향이다 아니다 역시 가늠이 필요하다. 물론, 대부분 온전하게 괜찮은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임시방편에 그칠 수 있어도 되도록 그 순간 최선일 수 있는 안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가 다시 쓰러지지 않게 절대 포기하지 말고 참아 어떤 역경도 난 맞서 싸워줄 수 있어 날 잡아줘 마지막까지 난 너를 포기할 순 없어 더 이상 주저하지마 다시는 쓰러지지 않게 또 우린 다시 일어서야 해.

 

 

기획자는 결국 핑계대지 않아야만 한다.

이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며칠 전에 런칭한 서비스에 대해서 생각을 쓴 2012년 9월 12일의 글이다.

 

유독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 기획자는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일정관리가 좋은 UX보다 우선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가장 급한 옵션은 합의 가능한 수준에서 최대한 스펙을 줄여내는 것이다. 이것 좋아 보여 저것이 좋아 보여 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그건 종국에 괴기스런 서비스를 만들게 될 것 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고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게 하는 지 대부분의 실무자라면 짐작하고 있다. 불가능이란 없다, 라는 말을 맹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 일이 한 사람이 진행하는 일이라면, 혼자 다 만들게 된다면 그건 개개인의 '의지'로 좌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것이 두 명 이상의 일이 되면 그 것은 의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문제로 변모한다.

 

각각의 프로젝트는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늘리고 새로운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매출 혹은 순수익을 올리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는 것이 맞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것은 그 목적이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것을 실제 진행시키는 것도 사람이고 그 안에서 일정을 딜레이시키는 것도 엄청난 활약을 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까지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그 일을 진행시키는 주역들을 힘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이 것을 해야할 너의 개인적인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힘을 북돋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던 게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내 생각이었다. '일정이 그러니까', '해야하는 일이니까' 라는 식으로 모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과연 장기간 지속되는 프로젝트를 모든 사람이 버틸 수 있을까? 이 프로젝트의 성공이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 라는 말을 매우 추상적으로 상명하달식으로 전달해봐야 그 것이 정말 열정의 동인이 될수 있을까?

 

열정과 꿈을 명목으로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열정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열정이 있다고 해서 청춘이 아파도 되는 것은 아니고 그 고통을 인내하고 버티라고 훈계하기에 우리의 윗세대들은 솔직히 별 고생없이 컸다. 이름있는 대학을 나오면 별달리 원서를 빡세게 쓰지 않아도 되었고 치열하게 공부를 하지 않아도 교수직까지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쥐뿔도 없는 경력에 고작 멀쩡한 체력만 믿고 디립따 달리고, 연륜이 있는 이들과 경쟁해야한다. 지금 우리의 경쟁자들이 자라던 시기에는 경제는 자꾸 성장했고 새로운 칸이 생기던 시대에 있던 이들이 말하는 열정의 무게가 지금의 무게는 그 차이가 상당한데, 세대가 다른 이가 말하는 열정과 꿈은 사람의 제한된 HP를 늘릴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덕트 매니저가 해야할 일이라곤 열정과 꿈이 다치지 않게, 지리한 물리적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들지 않게 토닥여주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 모든 이들에게 같은 이유가 있지는 않다. 그런데 정작 나는, 과연 어떤 이유로 이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일까?

 

열정과 꿈을 명목으로 물리적인 시공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아야만 한다. 핑계를 만들기 시작하면 말을 하는 사람도, 그 것을 듣는 사람들 역시 지치게 된다. 그리고 처음 다짐과는 달리 다들 지치게 만드는 말을 나 역시 했었다. 어떤 핑계거리를 만들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청춘과 에너지를 앗을 수는 없다. 이유가 아니라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황은 자꾸 흘러흘러 핑계를 만들 수 밖에 없게 할 수 있다. 매번 우리는 그런 일에 직면하고 그 말을 내키지 않아도 입에서 뱉어 내야만 한다. 알면서도 한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쓴 말과 글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게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기획자가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결국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당위론으로 끝나버린 이 글을 어떻게 해야 하나. 자꾸 반복해 말했듯이 이렇게 장황하게 써놓으면 스스로의 행동을 다잡아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말과 글에 책임감을 느끼는 게 기획자의 시작과 끝인 것 같으니 말이다.

 

끝으로, 기획자에게는 퀄리티와 기간 모두 중요하다. 시작은 퀄리티로 하지만 일정 시점을 넘어가면 기간이 퀄리티보다 중요하게 된다. 그리고 또 어느 시점을 넘기면 퀄리티고 자시고 기간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된다. 그 시기를 넘기면, 퀄리티가 눈에 보여 자괴감을 떠안는 날이 온다. 그러고 나면, 또 다시 헷갈린다. 퀄리티와 일정 중 뭐가 더 중요한 지 판단은 시점에 달려있는데, 그 건 규칙이 없다. 그래서 기획이라는 게 어렵고 복잡하고 고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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