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바다는 좋은 뱃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Review/읽은 것들에 대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외로운 몽상가가 백야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스첸카를 만나 짧고 찬란한 사랑을 경험하지만, 결국 홀로 남아 그 순간의 행복을 간직하는 이야기

by kimdirector· 2026. 10. 19. 08:02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몽상 속에서 살아가던 한 청년이 나스첸카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짧은 사랑 이야기. 두 사람은 백야가 이어지는 며칠 동안 서로의 외로움과 고민을 나누며 가까워지고, 청년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나스첸카는 기다리던 연인과 재회하고 청년은 다시 혼자가 된다. 소설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서도 한순간의 행복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깊은 의미를 남길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린 소설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Белые ночи, White Nights (186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역 김희숙 · 월마 · 2026.06.26 · 러시아소설, 단편소설

 

2026.09.21 ~ 09.25 · 5시간 30분

 

 

 

 

 

도스토옙스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설인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인간의 죄와 욕망, 신앙과 구원을 깊이 파고드는 무겁고 어두운 작품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스물여섯 살 무렵에 쓴 『백야』는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는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 소설에도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지만, 그보다는 젊은 시절에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서툰 사랑과 설렘, 기다림과 상실이 훨씬 투명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도스토옙스키에게 이런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꽤 인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은 『백야』라는 원제보다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라는 제목을 앞세운 판본이었다. 처음 제목만 보았을 때는 도스토옙스키의 『백야』가 아니라 전혀 다른 현대소설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제와 너무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작품의 정서를 상당히 잘 담아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밝은 밤에 만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헤어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원문까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다른 번역소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부분이었다. 물론 러시아어를 모르기도 한 부분이라 오히려 책의 분량을 늘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백야』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는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부른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가까운 친구도 없고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다. 혼자 거리를 걷고 건물과 풍경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삶을 머릿속으로 만들어 살아간다. 처음에는 이런 몽상가의 모습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세상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기보다 자신의 상상 속에 숨어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 보니 그의 몽상이 단순히 현실도피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 몽상은 외로운 현실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 상상 속에서 사람과 관계를 만들고,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삶을 그 안에서 대신 살아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몽상가라는 인물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던 어느 백야의 밤, 몽상가는 울고 있는 젊은 여성 나스텐카를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빠르게 가까워지고 다음 날에도 다시 만나기로 한다. 몽상가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기다려주며, 내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스텐카에게는 이미 기다리는 남자가 있다.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하숙했던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1년 뒤 돌아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채 모스크바로 떠났다. 나스텐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만, 1년이 지나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다.

 

몽상가는 그런 나스텐카를 위로하고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녀의 사랑을 도와주면 줄수록 정작 자신은 나스텐카를 사랑하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백야』에서 가장 안타까웠다. 몽상가는 처음부터 나스텐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마음이라는 것이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몽상가가 사랑한 것은 나스텐카라는 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스텐카를 통해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일 만날 사람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함께 거리를 걷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평생을 혼자 살아온 몽상가에게는 그것이 사랑만큼이나 커다란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흘이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몽상가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수많은 날보다 나스텐카와 함께했던 네 번의 밤이 훨씬 더 선명한 삶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중 기다리던 남자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자 나스텐카의 마음도 조금씩 몽상가에게 움직인다. 몽상가는 마침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나스텐카 역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제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나스텐카가 기다리던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달려간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허무하면서도 강하게 남았다. 불과 몇 순간 전까지 자신과 미래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몽상가는 그 자리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몽상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너무 잔인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스텐카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 않았을까. 몽상가의 마음을 알면서 기대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에게 돌아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스텐카 역시 비난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몽상가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스텐카 또한 기다림과 불안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외로운 사람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외로움을 잠시 채워주었지만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더욱 씁쓸했다. 다음 날 나스텐카는 편지를 통해 몽상가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몽상가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이후였다. 몽상가는 자신을 떠난 나스텐카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시간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짧은 순간 자신에게 행복을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한순간이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 문장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떠났는데, 함께했던 짧은 행복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책을 덮고 나니 이 문장이 계속 마음에 쓰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관계가 끝나면 그 관계 전체를 실패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거나 우정이 끝났거나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까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백야』를 읽으면서 끝났다는 사실과 그 시간이 행복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짓이었던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이것이 내가 『백야』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몽상가의 사랑은 분명 실패했다. 나스텐카와 함께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통해 처음으로 현실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행복해하고, 상처받았다. 평생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살아가던 사람이 비록 나흘뿐이지만 현실의 삶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몽상가의 사랑을 완전한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스텐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몽상 속에서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스텐카는 그의 곁에 남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현실에서도 자신이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이 작품에서 사랑보다 더 마음에 남은 감정은 고독이었지 아니까 생각한다. 『백야』가 176년 전에 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몽상가의 외로움은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은 SNS와 메신저를 통해 언제든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보고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실제로는 혼자라고 느낄 수 있을 법하다. 그런 점에서 페테르부르크를 혼자 걸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살아가는 몽상가와 오늘날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싶다.

 

어쩌면 이것이 오래된 『백야』가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 다시 읽히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고,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시대가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야』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한 외로운 남자가 우연히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실연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그 짧은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특히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사랑의 가치를 반드시 그 사랑의 결말로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오래 지속된 관계를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고, 끝난 관계를 실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했던 단 하루가 몇 년보다 행복할 수도 있고, 결국 헤어진 사람에게서 받은 짧은 온기가 오랫동안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백야』를 단순한 짝사랑이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내게 이 작품은 영원하지 않은 행복도 충분히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의 내 대답은 아마도 ‘그렇다’에 가깝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사랑했던 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떠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주었던 행복까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몽상가에게 나스텐카와 함께한 나흘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아주 짧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있고 순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의 몽상가가 마냥 불쌍하게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나스텐카를 만나기 전의 몽상가와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않을까 싶다.

 

"가장 밝은 밤에 시작된 사랑은 가장 눈부신 순간에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 짧은 행복이 한 사람의 삶에서 결코 짧은 의미로만 남지는 않았다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백야』를 읽고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행복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가 아니라, 단 한순간이라도 내가 정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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