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다시 확인해가는 과정을 통해 후회와 두 번째 기회, 타인의 판단과 자신의 선택,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섬세하게 그린다. 특히 젊은 사랑의 설렘보다는 상실과 후회를 경험한 성숙한 인물들의 감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매력을 가진 소설

설득
Persuasion, 1817
제인 오스틴
역 전승희 · 민음사 · 2017.04.21 · 영미소설
세계문학전집 348
제인 오스틴의 『설득』을 읽기 전에는 제목 그대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설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막연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소설의 시작에는 주인공 ‘앤 엘리엇’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하나의 ‘설득’이 존재한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제목이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랑을 포기한 사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설득』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자신의 삶을 맡겼던 한 여성이 오랜 시간을 지나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스스로 믿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설득』은 아주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니었다. 극적인 사건이 연속해서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 전체적인 흐름이 비교적 평탄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중간중간 조금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집중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의 연애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옛 시대의 모습과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공 앤 엘리엇은 준남작 월터 엘리엇 경의 둘째 딸이다. 엘리엇 가문은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경제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 월터 경은 자신의 외모와 신분에 대한 자부심과 허영심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집안에서 앤은 조금 특별한 존재다. 아버지나 언니처럼 신분과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런 앤의 장점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 젊은 시절 앤은 해군 장교 프레더릭 웬트워스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당시 웬트워스에게는 재산도 사회적인 기반도 없다. 앤이 신뢰하고 의지하던 레이디 러셀 역시 이 결혼을 반대한다. 사랑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기에는 위험하다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결국 젊은 앤은 주변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웬트워스와 헤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선택 이후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웬트워스는 해군에서 성공해 재산과 명예를 얻은 반면 앤은 스물일곱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채 가족 안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이 재회부터 『설득』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만났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두 사람. 다시 만난 웬트워스는 더 이상 과거의 가난한 청년이 아니다. 해군에서 성공한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앤에게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이 남아 있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연애소설이었다면 대화를 통해 비교적 빨리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들이 오해와 침묵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특히 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웬트워스가 다른 젊은 여성들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웬트워스는 활달하고 젊은 루이자 머스그로브와 가까워지고, 주변에서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앤은 그 모습ㅁ을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 이 부분에서 앤의 감정이 상당히 섬세하게 묘사된다.
질투하고 있지만 질투한다고 말할 수 없고, 아직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과거에 자신이 먼저 웬트워스를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게 다시 다가갈 명분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설득』에서 중요한 사건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사건이라기보다 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있다고 볼 수 있곘다. 이제는 앤은 8년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웬트워스 역시 앤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과거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여성이 이제는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루이자가 라임에서 사고를 당하는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만든다. 갑작스러운 사고 앞에서 주변 사람들이 당황하는 동안 앤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들을 움직인다. 웬트워스는 이런 모습을 통해 앤의 침착함과 판단력, 배려심을 다시 발견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과거 웬트워스가 앤에게 실망했던 이유가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는 루이자의 성격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조건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것과 올바른 판단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과거의 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의 조언을 믿고 사랑을 포기했다. 하지만 8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재회는 단순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두 사람이 각자의 시간을 통과한 뒤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후반부에 이르면 앤 주변에는 또 다른 결혼 가능성이 등장한다. 엘리엇 가문의 상속자인 윌리엄 엘리엇이 앤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웬트워스 역시 앤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설득』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웬트워스의 편지가 등장한다. 오랜 시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을 웬트워스는 편지에 담는다. 과거의 상처와 오해를 지나서도 여전히 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두 사람은 8년 전 끝났던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단순히 ‘첫사랑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결혼했다’는 결말로만 읽고 싶지는 않았다. 8년 전의 앤이었다면 다시 같은 상황이 찾아왔을 때 주변의 의견에 흔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결합은 사랑의 회복인 동시에 앤이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되찾는 결말처럼 느껴졌다. 『설득』이 단순한 로맨스 소설 이상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여성에게 결혼은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성이 독립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누구와 결혼하는가는 사랑의 문제인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앤에게 웬트워스와의 결혼을 포기하라는 조언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당시 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기반도 사회적 지위도 불확실한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자신의 미래 전체를 걸어야 하는 선택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설득』에서 인물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오늘날처럼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시선과 대화, 편지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확인한다. 처음에는 이런 방식이 상당히 답답했다. ‘그냥 서로 이야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답답함 속에서 그 시대 사람들이 사랑하고 연애했던 방식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이 고전소설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설득』에는 사랑 이야기 외에도 당시 영국 사회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앤의 아버지 월터 엘리엇 경은 귀족이라는 신분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능력은 부족하다.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허영심을 버리지 못하고 체면과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웬트워스를 비롯한 해군 장교들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부와 사회적 지위를 얻는데, 이 대비가 흥미롭다. 월터 경이 태어난 신분만으로 권위를 유지하려는 과거의 계층을 상징한다면, 웬트워스는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지위를 만들어가는 계층을 보여준다. 결국 앤이 웬트워스를 선택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낡은 신분질서보다 개인의 능력과 성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도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개인적으로 책읽는 것만을 놓고 보면 『설득』은 분명 조금 지루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큰 사건이나 흐름의 큰 변곡점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방문과 식사, 대화와 산책, 서로의 감정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대화를 세밀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집중력이 쉽게 흐트러지기도 했다. 때문에 읽는 동안 어느 정도 인내심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이러한 느린 흐름 자체가 『설득』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을 겪으면서 앤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가’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려하고 극적인 사랑은 아니지만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온 사람이 다시 사랑할 기회를 얻고,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믿고 선택한다.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답게 결혼과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누구의 판단으로 선택할 것인가를 묻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젊은 앤에게 레이디 러셀이 했던 조언에도 충분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결국 그 선택의 책임을 누가 지느냐는 것이다. 앤은 다른 사람의 설득을 받아들여 웬트워스를 포기했고 그 선택을 오랫동안 후회한다. 그러나 그 후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판단을 믿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제목인 『설득』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누군가의 설득에 흔들리지 말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조언과 자신의 판단 사이에서 결국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읽혔다. 솔직히 말하면 빠르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특별히 강렬한 사건도 많지 않고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느껴지는 관계와 대화도 많았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읽다 보면 그 느린 이야기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사랑했던 방식과 여성이 결혼을 선택해야 했던 현실, 그리고 시대가 변화하는 모습까지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앤과 웬트워스의 사랑이 인상적인 것은 첫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타인의 설득 때문에 놓쳐버렸던 사랑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다시 선택했다는 것. 그것이 조금은 답답하고 평범하게 흘러가는 『설득』을 끝까지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