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저 김훈 · 푸른숲 · 2021.04.23(개정판) · 한국소설
2025.06.19 ~ 06.27 · 3시간 43분
2005년에 쓴 동명소설 ‘개’를 다시 고쳐 썼다고 했다. 큰 줄기는 유지하면서 내용을 상당 부분을 고쳤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2005년 버전의 ‘개’를 읽어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서문에서 밝힌 김훈 작가의 말을 빌어서 얘기하면 아래와 같다.
큰 낱말을 작은 것으로 바꾸고, 들뜬 기운을 걷어내고, 거칠게 몰아가는 흐름을 가라앉혔다. 글을 마음에서 떼어놓아서 서늘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야기의 구도도 낮게 잡았다. 가파른 비탈을 깎아내려서 야트막한 언덕 정도로 낮추었다. 편안한 지형 안에 이야기가 자리 잡도록 했다. 2005년의 글보다 안정되고 순해졌기를 바란다. <군말>에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진돗개 수컷 ‘보리’다. 이야기의 흐름은 보리를 통해서 전개되는 1인칭 시점이고, 태어나면서 3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댐 건설로 인해 작은 시골 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해서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시점에 ‘보리’와 그의 형제들이 태어난다. 주인인 노부부의 자녀 중에서 큰 아들네는 도시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고, 둘째 아들네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어부로 살면서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다. 시골 마을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되자 ‘보리’는 둘째 아들네가 살고 있는 작은 어촌 마을로 이동해서 살게 되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야기 속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특히, 보리와 함께 태어난 형제들 중에는 다리를 다쳐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자 보리의 어미는 그런 새끼를 그냥 두지 않았다. 짐승들은 강한 놈만 키운다는 본능에 충실해서일까.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다리를 다친 새끼를 스스로 삼키고 만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주인 할머니는 그런 어미에 매를 들어 혼을 낸다. 결국 주인 할머니는 어미를 개장수에게 팔아 버리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작은 어촌 마을에는 힘이 세고 억세게 생긴 잡종견이 있었는데, 이름은 악돌이라 부르는 개가 등장한다. 돼지 농장에서 돼지를 지키는 일이 주된 일이지만,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 영역 표시를 하며 세력을 확장해 가는 개를 상대로 몸집이 작고 어린 진돗개 ‘보리’는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흰순이'라고 하는 암컷이 옆동네에 살고 있는 개를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는 마음은 있지만, 어찌해 볼 생각은 없는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인 보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나중에는 악돌이의 새끼를 낳고 기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어 뒤돌아서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 할머니의 둘째 아들인 어부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게 되고 가족은 생계를 위해 그리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결국 어촌 마을을 떠나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고 주인 할머니는 어촌 마을에 남아 집이 팔릴 때까지 보리와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보리는 태어난 곳과 자란 곳에서 두 번이나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간다. 첫 번째 시골 마을에서는 댐 건설로 인해 마을이 수몰될 위기 속에서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그러면서 어미는 개장수에게 팔리고, 보리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되었고, 두 번째는 보리가 자란 곳으로 어촌 마을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 가지만 갑작스럽게 죽은 주인 둘째 아들이 풍랑에 위해 죽으면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되자 둘째 아들네 가족은 집을 떠나 도시로 이사하게 될 처지이지만, 주인 할머니는 둘째 아들네 집이 팔릴 때까지 보리와 함께 지내기로 한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이야기로 보리가 짝사랑한 흰순이가 개장수에게 팔려가는 모습을 보지만, 보리는 그런 일에 슬퍼하거나 울지 않았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닥쳐 올 일들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다. 만약 인간에게서 일어난 일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감정을 드러내 놓고 목 놓아 울었을 인간이었겠지만 개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쳐다만 보는 모습에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개의 감정을 인간에 비유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개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의 생각과 감정을 인간에 비유하며 스토리가 진행된다면 코미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나름 진지함과 덤덤함을 유지하고 있는 소설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보리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자연과 주변 환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들을 보면서 과연 개들도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보리의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점이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두 군데를 빌어서 얘기하자면 시골마을에서 떠나기 전에 어미가 온전치 못한 자식인 새끼를 잡아먹어야만 했던 일에서 노부부는 그런 어미에게 모질게 매 질을 한다. 인간이 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이지만, 그런 어미를 바라보는 보리는 사람들은 남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을 치사하고 비겁하게 여기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처럼 눈치 보라는 것은 비굴하게 처신하라는 게 아니라 남들이 슬퍼하고 있는지 분해하고 있는지 배고파하고 있는지 외로워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척 보고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개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벌레들의 눈치까지도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며 그게 개의 도리고, 그게 개의 공부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경우라고 달라야 할 까닭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노부부의 둘째 아들의 두 돌배기 영수가 싼 똥을 보리가 먹어서 야단맞는 장면도 있다. 보리는 그 똥을 먹은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똥을 먹는다고 해서 똥개가 아니라 도둑이 던져주는 고기를 먹는 개가 똥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되도록이면 싸우거나 달려들지 않고, 짖어서 쫓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람들의 동네에서 살아야 하는 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쓸데없이 싸우다가 다치지 않고, 기어이 싸워야 할 때를 위해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힘을 모아두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는 것을 보리가 조금 더 성장한 후에 깨닫게 된다.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고 불쌍함이며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인간과 함께 한 모든 순간에 ‘보리’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개는 개일 뿐이라 하지만, 인간이 때려도 인간이 부르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을 인간은 이해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보리가 인간보다 나은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듯싶다. 인간의 잣대로 보리를 견주어 보더라도 인간보다 못한 부분은 없을 듯싶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의 보리는 그런 존재로 비친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인간들은 인간이기에 보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뿐이고 보리 또한 그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할 뿐일 것이다. 읽는 내내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 없는 것 또한 거짓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소설 ‘개’는 김훈 작가 특유의 담담하게 풀어가는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읽었던 “칼의 노래”와 ‘하얼빈’에서 느꼈었던 인간 내면의 깊은 묘사를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면 “개”를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점이 특징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이 소설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책 속에 이미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이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물 흐르 듯 천천히 읽다 보면 어느새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상적인 문장
15년여 전의 글이 낯설어 보이니, 마음이 세월과 더불어 늙었음을 알겠다. 마음이 늙으면 나 자신과 세상이 흐리멍덩하고 뿌옇다. 개념의 구획이 무너진 자리에 작은 자유의 공간이 생겨나는데, 늘 보던 것들이 처음으로 보여서 놀란다.
나는 날지 못한다. 나는 개이므로 고향이 있고, 주인이 있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고 주인의 집에서 잔다. 나는 개이므로 네발로 땅바닥을 박차고 달리고, 땅 위의 모든 냄새를 들이마시는 것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곳이 내 고향이며, 사람 냄새가 나는 모든 주인이 내 주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젊고 힘센 개였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나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달을 밟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려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