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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작가 사유적 사색과 자기 성찰적 의미의 가치를 더한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일기체 소설

by kimdirector·2025. 7. 21. 08:03·

 

 

 

 

 

 

말테의 수기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저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역 문현미 · 민음사 · 2005.01.15

에세이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

 

2025.07.11 ~ 07.18 · 7시간 36분

 

 

 

 

 


 

 

 

 

 

‘말테의 수기’는 오스트리아 출신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하지만, 소설이라는 표현보다는 에세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딱히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어찌 보면 단편적인 기억을 더듬어서 또는 그때그때마다 메모한 것들을 모았다고 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제목에 수기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가 할 수 있다. 전체 흐름은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라는 청년의 1인칭으로 진행되고 과거형으로 써 내려간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디. 하지만 연도나 날짜를 기입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것 같은 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소설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보니 전체적인 흐름의 맥이 끊기는 느낌도 있다. 단순하게 단락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인지 내용 파악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뒤새김질해야 하는 수고도 감내해야 했다. 집중력을 가지지 않으면 그만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보니 조금은 난해한 부분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1902년 로댕연구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파리 생활을 경험하면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파리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표현하는 부분들을 보면 1900년대 초 대도시인 파리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대도시 파리의 밝은 모습이나 활기찬 도시의 이미지에서 알 수 있는 반가운 보다는 빈곤과 침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파리에서 무의미한 것과 타락, 암흑, 죽음 그리고 절망을 직접 보고 체험했기 때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말테의 수기’를 썼다고 했다. 개인의 고유한 삶과 죽음, 질보다 양적 팽창으로 인한 대도시의 암울함을 기록했으며, 그 안에서 어찌할 수 없이 빈곤과 죽음, 고립 그리고 고독이 주는 공포스러움에 파리를 돌아다니는 인간상을 릴케 특유의 섬세함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인들, 죽지 못해 자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보며 죽음마저 대량 생산되는 대도시의 현실을 직시하고,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하는 릴케의 모습도 드러내기도 하며 비정함 마저 대도시의 풍경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파리라는 도시의 병든 풍경 속에서 말테는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성찰하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말테의 수기’는 단순한 줄거리보다는 인간 존재의 본질, 고독, 죽음, 시간, 신, 예술을 다룬 릴케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고백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죽음이 대해서 깊이 있는 사색을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죽음이 단순하게 예식에 가까운 것이 아닌 개인의 고유하게 감내하고 부딪히는 문제임을 말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외롭고 고독함 마저 개인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죽어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 간다. 릴케는 시인답게 깊이 있는 사색을 통해 특유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 되묻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말테의 수기’에는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의 몰락한 가족들의 관계 또는 친척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심도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족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섬세한 묘사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릴케가 시인이라는 점이 작용한 듯하다. 그리고 릴케는 로댕의 비서로써도 활동을 하면서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관찰하는 능력을 키웠다는 사실도 이 소설을 통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말테의 수기’는 특별한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들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말테가 파리에서 겪는 가난과 병, 이방인으로서의 체험의 모든 것은 비로소 고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독은 스스로에게도 두려움이라는 것이고, 두려움은 인간이 가지는 필연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릴케는 이 고독 속에서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발견해 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또한, 릴케는 죽음을 인간의 필연으로 받아들이며, 피상적이고 다른 이의 것처럼 인식하지만, 곧 자신의 죽음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또한, 릴케는 죽음을 통해서 역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 인상적인 부분은 말테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존엄성 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슬퍼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릴케는 시인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시인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고통에 대해서도 잘 서술하고 있다. 내면의 복잡함으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것을 언어를 통해 진실을 이끌어 내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말테는 끊임없이 사색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어 낸 고통을 인정하려 애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말테의 수기’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말테가 파리에서의 고된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에서 얻었던 고독감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투영되고 있지 않은지 라는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도시인 파리 속에서의 소외감, 이질감, 죽음에 대한 것들에 대한 고독감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시대에도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테의 수기’는 쉽게 읽히는 소설은 분명 아닐 듯하다. 단편적인 이야기들, 파편회된 기억들, 작가 사유적 사색에 담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점을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방황하며 흔들리는 모습도, 고독 속에서도 본인을 찾아가는 것도 인간이기에 가능한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을 법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일상적인 문장

 

비록 나는 가난하여, 매일 입는 옷도 몇 군데 해어지기 시작했고, 구두도 여기저기 말썽을 피우기 시작하지만, 칼라는 깨끗하고, 속옷도 깨끗하다. 그래서 이대로 어느 다과점에 들어가도 되겠고 그것도 번화가 큰길가에 있는 다과점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접시에서 케이크를 손으로 집어낼 수도 있을 거다. 아무도 그런 행동을 조금이라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며, 욕을 하거나 나를 쫓아내는 일도 없을 거다. 가난하긴 해도 내 손은 좋은 가문 출신의 손이며, 하루에도 네댓 번이나 씻기 때문이다. 그렇다, 손톱 속에는 때라곤 하나도 끼어 있지 않고, 글씨 쓰는 손가락에 잉크 하나 묻어 있지 않다.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 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 집도 없고 상속받은 물건도 없고 개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은 도대체 어떤 생활일까. 최소한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누가 그것을 갖고 있나? 만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해도 그건 땅속에 묻혀버린 것과 같다.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서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진다. 좀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다. 맙소사, 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 그저 와서 생을 발견하면 그만이다. 그저 그것을 기성복처럼 입기만 하면 된다. 자기 뜻으로 가거나 가도록 강요를 받는다. 자, 그러니 노력할 필요가 없다. 「선생님, 여기 당신의 죽음이 있습니다」사람은 닥치는 대로 죽는다. 자기가 앓는 병에 딸린 죽음을 죽는다.

 

거리는 너무나도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가 지루해하며 내 발 밑에서 걸음을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내 걸음을 빼앗아 나막신을 신은 듯이 이리저리 딸가닥거리며 돌아다녔다. 여자가 그 소리에 놀라 너무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얼굴이 두 손 안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손 안에 비어 있는 얼굴의 틀을 보았다. 시선이 손에 머물러 있는데도 손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했다. 얼굴을 안쪽에서 보는 일도 소름 끼쳤지만, 얼굴 없는 적나라한 상처투성이 머리통을 보는 일은 훨씬 더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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