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바다는 좋은 뱃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Review/읽은 것들에 대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가난한 사람들’ 가난 때문에 사랑과 존엄마저 위협받는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인간의 선의와 사회적 불평등을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

by kimdirector· 2026. 7. 27. 08:03

 

 

 

 

 

가난한 사람들

Бедные люди

 

포도르 도스토옙스키

역 이항재 · 민음사 · 2024.05.22 · 러시아소설

세계문학전집 443

 

2026.06.25 ~ 07.01 · 7시간 09분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조금은 무겁고 오래 남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에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을 펼쳤다.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사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거대한 작품들로 먼저 만나기에는 조금 망설여졌고, 그의 시작점이 된 데뷔작을 읽는 것이 오히려 작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그렇게 선택한 책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스물네 살 무렵 발표한 첫 장편소설이자 그를 단숨에 러시아 문학의 중심으로 올려놓은 출세작이다. 당시 최고의 작가였던 고골에 빗대어 ‘새로운 고골’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훗날 그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인간 심리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시선이 이미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새롭게 번역된 이번 판본은 편지 형식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전달해 주었고, 18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가난한 사람들'은 중년의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시킨과 먼 친척뻘인 고아 소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서로 주고받는 54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편지뿐이지만, 놀랍게도 독자는 두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감정, 표정까지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사건은 크지 않지만 편지 한 장 한 장에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편지를 읽다 보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가난’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마카르에게 가난은 매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고, 누군가의 비웃음 앞에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 만드는 감정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흔들리게 만드는 현실이다. 그는 바르바라를 위해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고, 더 좁고 열악한 방으로 옮기고, 가진 것을 하나씩 내어준다. 그의 희생은 결코 영웅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고 소박해서 더 아프게 느껴지기 까지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카르가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보다 그녀의 삶을 먼저 걱정하고,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자신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다소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순수하고 헌신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어주는 일은 부유한 사람이 일부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반대로 바르바라는 마카르의 희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괴로워한다. 도움을 받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그 도움 때문에 마카르의 삶이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자신의 행복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끝내 함께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을 제3자의 시선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않을까 싶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들에게 직접 말할 기회를 준다. 마카르와 바르바라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스스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읽는 이들는 그들을 불쌍한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가 높이 평가받았던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는 마카르와 바르바라뿐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병든 대학생 포크롭스키, 늙은 아버지, 평생 노동에 시달리는 하녀와 노파, 거리의 악사, 억울한 재판 끝에 삶을 마감한 사람들까지.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삶을 살지만 공통적으로 가난이라는 현실 속에서 존엄을 잃어간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사람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오늘날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소외는 시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카르가 고골의 '외투'를 읽고 큰 충격을 받는 부분이다. 그는 이야기 속 아카키예비치의 불행을 자신의 삶처럼 받아들이며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다. 문학 속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조롱당한 것처럼 느끼는 그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문학조차 현실과 분리된 허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도스토옙스키가 단순히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상처받고 무너지는지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일 듯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가난,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선량함, 그리고 희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카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하급관리이며,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양심을 잃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준다. 세상은 그를 초라한 사람으로 기억할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점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다운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읽는 동안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이어지는 편지들이 조금씩 쌓이며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부치지 못한 편지에 이르렀을 때는 화려한 결말보다 더 큰 여운이 남았디고 말할 수 있다. 그 편지들은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상징한다고 봐야 올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간 당시 이 원고를 처음 읽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소설은 도스토옙스키라는 거대한 작가의 출발점이 왜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받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해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파고들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놓치지 않는 그의 시선은 첫 소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와 존엄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강한 여운을 남긴다고 하면 틀리지 않을까 싶다.

 

무더운 여름에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은 계절과는 전혀 다른 차가운 현실을 보여주었지만, 그 속에서 오히려 인간다움의 온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만난 작품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의 문학이 왜 세계문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앞으로 읽어야 할 그의 책, '죄와 벌'이나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게 될 날이 기대된다고 하면 믿을까 싶다.

 

 

 

 

반응형

'Review > 읽은 것들에 대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승우, ‘생의 이면’ 작가 김부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진실의 불확실성, 그리고 삶의 숨겨진 이면을 탐구하는 철학적 소설  (0) 2026.07.20
최진영, ‘오로라’ 제주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통해 주인공이 사랑과 믿음,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탐색해 가는 성장과 성찰의 이야기이다.  (0) 2026.07.13
황석영, '할매' 600년 된 팽나무의 시선을 통해 인간과 자연, 역사와 생명이 하나의 거대한 순환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그려낸 황석영의 장편소설  (0) 2026.07.06
김애란, ‘바깥은 여름’ 예기치 못한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린 소설집  (0) 2026.06.29
나쓰메 소세키, ‘행인’ 근대 일본 사회의 지식인이 느끼는 불안과 인간관계의 단절을 섬세하게 탐구한 소설  (0) 2026.06.15
성석제, '투명인간' 평생 가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평범한 한 남자의 삶을 통해 보이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슬픔과 한국 현대사의 그늘과 사회적 소외를 그려낸 소설  (1) 2026.06.08
제러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인류 문명의 발전 격차가 인종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지리적 조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는 책  (0) 2026.05.25
황정은, ‘디디의 우산’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상처받은 개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0) 2026.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