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위협 속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를 배경으로, 젊은 유대인 작가가 세련된 유혹을 뿌리치고, 유년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지적장애 여인 쇼샤를 선택해 자신의 뿌리와 영혼을 지켜내는 소설

쇼샤
Shosha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역 정영문 · 빛소굴 · 2022.12.17 · 미국소설
페이지터너스 003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쇼샤'는 처음에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작품은 단순한 연애소설도, 역사소설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30년대 후반, 나치의 그림자가 서서히 바르샤바를 뒤덮기 시작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작가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더 오래 바라본다. 그래서 '쇼샤'는 홀로코스트를 이야기하면서도 죽음보다는 삶을, 절망보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는 유대인의 삶을 가장 인간적으로 그려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쇼샤'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짙게 녹아 있는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 역시 작가를 꿈꾸며 살아가는 젊은 유대인이고, 문학과 사랑,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는 점이다.
소설의 배경은 매우 암울하다. 반유대주의가 극심해지고 유럽을 배경으로 나치 독일의 침공이 임박한 바르샤바이고, 우리는 이미 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다. 곧 도시는 무너질 것이고,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당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아직 그 결말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하고, 질투하고, 토론하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때문인지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에 묘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인공 아론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작가로 성공하고 싶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한다. 미국에서 온 백만장자에게 희곡을 의뢰받으며 새로운 기회를 얻고, 여러 여성들과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자유로운 예술가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늘 공허하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삶을 떠돌고 있던 어느 날,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서 소꿉친구 쇼샤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 순간 아론은 자신이 평생 찾아다닌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바로 쇼샤였다. 정확히 말하면 쇼샤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징처럼 느껴질 법한 '순수함'에 있었다.
쇼샤는 몸과 정신의 성장이 멈춘 듯한 인물이다. 세상의 계산법을 알지 못하고, 욕망이나 야망도 없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부족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거짓됨이 없고, 욕심이 없으며,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현한다.
읽는 동안 가장 오래 생각하게 만든 것은 아론이 왜 그렇게 많은 여성들을 만났음에도 결국 쇼샤에게 돌아오는가 하는 점이었다. 소설에는 베티 슬로님처럼 아름답고 재능 있는 배우도 있고, 셀리아처럼 지적이고 관능적인 여성도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아론에게 현실적인 행복을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론은 끝내 쇼샤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사랑이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쇼샤는 아론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자, 세상이 아직 순수했던 시간이며, 무엇보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인간다움을 상징한다.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 그는 성공이나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결국 쇼샤는 한 사람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영혼의 순수함을 의미하는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쇼샤 외에도 매우 인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베티 슬로님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깊은 공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녀는 죽음을 포도주에 비유하며 천천히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갈 이유보다 죽음을 더 자주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은 욕망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리스 파이텔존은 작품에서 가장 철학적인 인물이다. 그는 종교와 무신론, 우주와 인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혼돈조차 창조의 일부일 수 있다는 그의 사상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인물이기도 했다.
셀리아는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체념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시대와 운명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얼마나 쉽게 현실에 굴복하게 되는지를 알게 해준다.
반면 하이믈은 어딘가 부족하고 서툰 사람이지만 삶 자체를 사랑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거창한 철학은 없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의 순박한 태도는 오히려 소설 속에서 가장 건강한 삶의 방식처럼 느껴졌다.
'쇼샤' 가 특별한 이유는 이처럼 어느 한 인물도국한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누구 하나 선하거나 악한 사람으로만 그려지지도 않는다. 모두가 욕망과 두려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읽고 있으면 소설이라기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긴 철학적 토론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때도 있다는 점도 흐미롭다고 할 수 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작품이 죽음을 매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죽음만 바라보며 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하고, 글을 쓰고, 논쟁하고, 식사를 하며 평범한 하루의 일상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죽음이 가까울수록 인물들의 선은 더욱 짙어지고 삶은 더욱 선명해진다. 죽음이 삶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쇼샤가 아론에게 묻는 대화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나치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돼?"
"죽어야지."
"함께?"
"그래."
"우리가 죽게 된다 하더라도 네 옆에 눕는 건 좋아."
이 짧은 대화에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 있을 듯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누구와 함께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가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쇼샤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그 순수함은 오히려 시대의 폭력보다 더 강한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쇼샤' 를 읽으며 가장 놀랐던 점은 이야기 자체는 매우 잔잔하다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반전이 이어지는 소설이 아니다보니 조금은 심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책을 덮을 수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에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고, 역사적 비극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의 마음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더욱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는 부분이 조금은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을 덮고 나니 제목이 왜 '쇼샤'인지 비로소 이해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쇼샤는 단순한 한 여성의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쇼샤는 인간이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순수이며, 사랑이고, 창조이며, 희망이다.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간다움 그 자체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쇼샤'는 역사소설도, 사랑 이야기만도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문학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비극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빛나는 인간의 사랑과 순수함을 보여준다 할 수 있곘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자신의 소설 가운데 가장 사랑했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것은 전쟁의 공포가 아니라 쇼샤의 순수한 미소였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져도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다. 지식도, 이념도, 성공도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지만, 그래도 뭐니 뭐니해도 서로에게 향하는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쇼샤'는 단순히 한 시대를 기록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 읽혀야 할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