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현실에 순응하며 일본을 동경하는 조카 ‘나’가 사회주의 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아저씨를 어리석다고 비판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작가는 오히려 조카의 왜곡된 가치관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 순응하는 당시 사회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역설적으로 풍자한 소설

치숙(痴叔)
채만식
도서출판 책꽂이 · 2017.09.01 · 한국소설, 단편소설
2026.08.28 ~ 08.28 · 41분
언론을 통해서 또는 주변인들로부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과거의 문학을 읽는 이유도 어쩌면 이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래전에 쓰인 소설을 읽다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가치관과 사회의 모순을 엿볼 수 있고, 때로는 그 모습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재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채만식의 『치숙』 역시 그런 작품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처음부터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작품인 만큼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낯선 단어나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당시의 구어체와 방언, 사투리가 섞인 문장도 많다. 지금의 문장 구조나 말투에 익숙한 입장에서는 한 문장을 읽고도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해 다시 읽어야 하는 부분이 종종 있었다. 때문에 이것이 단순히 오래된 소설이라서 그런 것인지,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말투와 표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낯설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화자인 조카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가는 서술 방식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 문체에 익숙해지고 나니 오히려 이러한 말투가 작품 속 인물과 시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치라는 생각도 하게 된 것도 이해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치숙』이라는 제목은 말 그대로 ‘어리석은 아저씨’라는 의미이다. 작품의 화자인 젊은 조카는 자신의 아저씨를 한심하고 부끄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아저씨일까. 오히려 아저씨를 조롱하는 조카야말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민족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선의 역전이 『치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소설은 ‘나’로 등장하는 젊은 조카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조카에게 아저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이지만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갔다 왔고, 옥고를 치른 뒤에는 몸까지 상해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처지다. 조카의 눈에는 이런 아저씨의 삶이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 것 같다. 좋은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돈을 벌고 출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회주의 같은 사상에 빠져 감옥까지 다녀왔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카는 아저씨를 존경하기는커녕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단순한 무능력자가 아니다. 그는 식민지 현실과 사회의 모순을 고민하고 더 나은 사회를 생각했던 지식인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결국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갔다. 출옥한 뒤에는 옥고의 후유증으로 건강까지 잃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진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은 아주머니다. 아주머니는 감옥에 다녀와 병들고 경제적 능력까지 잃은 남편을 버리지 못하고, 생계를 책임지면서 남편을 돌본다. 그러나 조카는 그런 아주머니의 행동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기준에서는 돈도 벌지 못하는 남편을 왜 그렇게 정성껏 돌봐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을 보여 준다. 아저씨는 식민지 현실과 사회 문제를 고민하다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이고, 조카인 ‘나’는 돈과 출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일본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아주머니는 몰락한 남편을 끝까지 돌보면서 부부 사이의 의리와 인간적인 정을 보여 준다. 『치숙』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조카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을 매우 현실적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조카가 생각하는 성공은 단순하다. 돈을 많이 벌고 안정적인 직업을 얻으며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일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일본식 생활을 받아들이며 일본 사회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삶을 동경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해 있는가도, 조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도 아니다. 자신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 조카의 눈으로 보면 아저씨는 당연히 실패자로 보일 것이다. 돈도 벌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감옥까지 다녀왔으며 병든 몸으로 아내에게 의지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시선으로는 조카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 오히려 조카가 아저씨를 비난하면 할수록 조카 자신의 무지와 속물적인 가치관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채만식이 『치숙』에서 보여주는 반어와 풍자의 핵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작가는 직접 나서서 조카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카가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자 역설적으로 조카 자신이 얼마나 식민지 현실에 무감각한 사람인지 스스로 드러내버린다. 때문에 뭐가 잘못되었고, 어떤 게 진실인지를 되묻게 된다. 대체 누가 누구를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단편소설의 『치숙』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조카가 바라보는 아저씨는 분명 ‘치숙’, 즉 어리석은 아저씨다. 현실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감옥에 갔으며 결국 가족에게 경제적인 부담까지 주었으니 조카의 기준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제목의 의미가 뒤집힌다. 아저씨에게도 현실적인 한계와 모순은 있다. 그렇다고 그를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순을 고민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했다. 반면 조카는 현실에 매우 잘 적응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적응하려는 현실 자체가 식민지라는 사실에는 무감각하다. 자신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을 동경하고, 일본인이 되는 것을 성공처럼 생각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치숙』이라는 제목은 아저씨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저씨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조카의 어리석음까지 드러내는 반어적인 제목으로 읽힌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조카 개인만을 비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조카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만들어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본이 지배하는 사회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질서에 적응해야 하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유리한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 결과 조카에게 민족이나 독립 같은 가치는 현실적인 삶과 동떨어진 것이 되고, 돈과 출세가 가장 확실한 목표가 된다. 이렇게 바라보면 채만식이 풍자하는 대상은 한 명의 철없는 젊은이만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식민지 현실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당시 사회의 모습까지 조카를 통해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채만식은 이렇게 거창한 역사적 사건 자체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문체를 따라가며 만나는 시대라는 점과 개인적으로 『치숙』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역시 문체와 언어였을 것이다. 요즘 소설처럼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나 표현이 등장하고 방언과 사투리, 당시의 말투가 그대로 사용되다 보니 처음에는 이야기의 의미를 따라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면 최소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조카가 자신의 생각을 계속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소설이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의 독자에게는 문장 자체가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내용보다 문장을 해석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할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읽다 보니 이러한 낯선 문체가 오히려 작품의 중요한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치숙』을 지금의 표준어와 현대적인 문장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린다면 훨씬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조카의 속물적인 성격이나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분위기는 그만큼 약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낯선 단어와 말투를 따라가는 과정 자체가 1930년대라는 낯선 시대로 들어가는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읽기 어렵다는 점이 이 작품의 단점처럼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를 직접 느끼게 만드는 고전 문학 특유의 매력이기도 했다.
『치숙』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읽으면서 과거의 이야기로만 느껴서는 안 되지 않나 싶다. 물론 오늘날의 사회를 당시의 식민지 상황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충분히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좋은 직장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벌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을 성공했다고 말한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보다 결과부터 바라볼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저씨를 바라보는 조카의 시선이 완전히 낯설지만은 않았다. 조카에게 아저씨가 한심한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사회를 꿈꾸었는지, 무엇을 위해 행동했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을 벌고 출세했다면 성공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실패라는 단순한 기준만 존재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게 된다.
“나는 사람의 삶을 무엇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경제적인 성공인지, 사회적인 지위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태도로 살아왔는지 말이다. 『치숙』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결국 시선의 역전이었다. 처음에는 조카가 아저씨를 평가한다. 조카의 말만 따라가면 아저씨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가족을 고생시키는 무능한 지식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는 어느 순간 반대로 조카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아저씨를 향한 조카의 비난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조카가 가진 황금만능주의와 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 식민지 현실에 대한 무지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채만식은 직접 누가 옳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누가 정말 치숙인가’를 판단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낯선 단어와 방언, 지금과 다른 문체 때문에 읽는 속도가 더뎠지만, 오히려 그런 불편함을 지나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니 왜 오래된 작품을 지금까지 읽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과거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역시 다시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숙』은 1930년대의 한 지식인과 조카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투영되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공의 기준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현실에 잘 적응한다는 이유로 더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어리석다고 판단하면서 정작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치숙』은 내게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고 믿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날카로운 반어와 풍자로 보여준 소설일 것이다. 낯선 문체 때문에 처음에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지만, 그 낯섦을 넘어 당시의 시대와 인물들을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오늘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