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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읽은 것에 대해서

'1984'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위시한 전체주의를 비판한 소설

kimdirector 2021. 4. 8. 08:50 

 

 

 

 

1984

 

저 조지오웰 / 역 임소연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08월 22일

영미소설 / 더디 세계문학 011

 

독서기간 : 2021/03/26 ~ 04/07

 

 

 

 


 

 

 

 

요즘 이상하게 어두운 느낌이나 부정적인 컨셉이 강한 소설들을 많이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지 읽고 싶은 책을 찾다 보니 그런 소설들만 찾게 되고 읽고 있는 듯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내 마음속에 내재된 무언가가 이런 책들을 요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조지 오웰'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 <동물농장>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이 소설로 인해 이 작가에 대한 생각이 방점을 찍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지 오웰'에 대해서 알고 있을 듯 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리 많이 읽히는 책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소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는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나에게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집중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냥 몇 장 읽기 시작했을 뿐인데, 어느새 소설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요즘에 읽은 책 중에서 집중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책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억지로 집중력을 요구하는 책들도 많이 있는데, 《1984》는 첫 장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의 집중도를 가지고 읽었던 것 같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정치사상적 소설가라고 스스로 얘기하고 있고, 그의 소설들은 대부분 일정한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게 하고 있다. 《1984》 또한, 작가의 의도대로 정치적인 성향이 뚜렷한 소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동물농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에 묘사하여 당시의 인물들을 동물에 비유하며 전체주의를 비판한 정치 풍자적인 소설을 그렸다면, 《1984》에서는 사상적 이념인 전체주의에 대해서 '오세아니아'라는 가상 세계를 통해 독재와 통제 그리고 감시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비유하며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다.

 

《1984》는 간단하게 얘기하면, 디스토피아적 소설의 대표 격으로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적 시각을 통해서 극단적으로 묘사했다. '오웰리언(Orwellian)'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오웰리언(Orwellian)'이라는 말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획일화되어 가고, 그 획일화를 위해 통제와 감시, 그에 따른 집단적 히스테리가 엮겨서 전체주의적 성향이 짙은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소설이 주는 의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겠지만,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꽤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1984》가 모티브가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도 그럴 것이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리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독재와 통제, 감시체계를 위시한 전체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1984》의 시대적 배경은 1984년으로 보이지만, 이 소설이 처음 소개된 시점인 1948년을 뒷자리만 뒤바꿔 1984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의 시대적인 배경에는 50여 년 동안의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서 지배층인 '빅 브라더'는 피지배층인 '프롬'을 통제할 명분을 만들고, 통제를 통한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활용하게 된다.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거짓된 정보와 조작된 정보를 피지배층에게 지속적으로 전파하며 지배층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통제와 감시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장치는 피지배층인 '프롬'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피지배층인 '프롬'들은 그런 지배층의 잘못된 정보를 통해서 자신들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그릇된 편견을 가지며 세뇌되어 가고, 오로지 당과 지배층인 '빅 브라더'만 위하는 사회에 귀속되어 살아가게 된다.

 

'텔레스크린'은 피지배층을 세뇌하고 감시하게 되는데, 조작된 정보를 텔레스크린 피지배층에게 전달함으로써 자신들의 삶은 전쟁 이전의 시대와 비교하면 현재의 삶은 매우 풍족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쟁 이전의 상황에 비해 더 낳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린 채 과거 속의 진실은 거짓된 정보로 덮어 버리고 날조하며 피지배층을 현옥 시키거나 세뇌하는 일에만 몰두하며 지배층의 꼭두각시가 되어 간다. 또한 지배층인 '빅 브라더'는 피지배층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라며, '빅 브라더'만이 삶의 빛이라는 허황된 믿음을  갖게 한다. 또한,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빅 브라더'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라며, 감시에 대한 믿음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피지배층에게 허락된 것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모두가 같은 메시지를 외치며, '빅 브라더'를 위한 지독한 충성심과 당을 위해 일하며, 오로지 그들만을 위하며 믿고 따르는 것일 뿐, 그 외에 모든 개인적인 것과 사생활의 자유는 얻을 수 없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는 사유화할 수 없다는 점이 이전에 읽었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개인의 ‘노동, 작업, 행위’를  통해 사유화가 되어야 인간의 조건이 완성된다고 얘기했으며, '한나 아렌트' 또한 전체주의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정치사상가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책의 장르는 다르겠지만, 같은 시각적 조건으로 본다면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감시와 통제에 대해서 간단한 문장이 소설 속에 쓰이고 있으며,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문구처럼 비쳐지고 오로지 거짓과 날조된 정보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장한다는 식의 논리로 "현재를 장악하는 자가 과거를, 과거를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라는 문구가 말해 주듯이 오로지 과거 속의 진실은 거짓으로 포장하여 현재를 이어가고, 미래를 담보한다는 의미인 듯하다. 하지만 어제의 일을 오늘을 기억하듯 과거 속의 진실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과거 속의 진실은 거짓으로 포장한다 하여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 속에서 당에서 하는 모든 일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한 남자가 있다.

 

주인공인 '윈스턴'이라는 남자의 직업은 모든 정보를 허위와 날조, 조작을 통해 기록하는 일을 한다. 어제 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정보까지도 거짓으로 포장하여 보고하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하는 일이 정당 한 지에 대해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당과 '빅 브라더'를 위해 일하면서 당을 의심하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심은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그러한 의심은 결국 전쟁 이전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증을 갖게 되고 주변인들에게 확인을 하며, 현재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여자 주인공인 '줄리아'는 윈스턴과의 연인 사이로 당과 '빅 브라더'에게 거짓된 충성심을 보이며, 윈스턴과 모처에서 잦은 만남을 가지게 된다. 둘은 당과 맞서 싸우기로 의기투합하며 '형제단'이라는 단체를 통해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찾은 듯했지만, 결국 당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2 더하기 2는 4이다'라는 명제를 당이 원하는 '2 더하기 2는 5이다'라는 거짓된 명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오로지 모든 진실은 당이 정하고 '빅 브라더'만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그릇된 진실만이 살아가는 척도로 보는 시각적이고 상징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원스턴에게 하는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문은 단순히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닌 오로지 치유하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그리고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러움으로 바꾸기 위한 치료 목적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중세시대에 기독교가 이단교를 없애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으로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얘기하고 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사람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하고 바꾸기 위해 행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두려움과 무섭기까지 했다.

 

《1984》는 주인공인 윈스턴의 이야기 속에서만 진행되고 있다. 윈스턴의 시각과 주변의 이야기들만 있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며 윈스턴의 심리적인 혼란스러움이 글로써 잘 드러내고 있고, 특히, 고문을 겪을 때의 부분은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심리적, 육체적인 고통을 디테일하게 잘 묘사하고 있어서 '조지 오웰'의 필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엄숙함이 느껴졌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고, '조지 오웰'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소설이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희망적인 부분은 찾을 수 없다. 오로지, 철저하게 전체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적인 내용들 뿐이다. 혹시나 마지막에 가서는 전체주의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가는 모습을 기대한다면, 또는 주인공인 윈스턴이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영웅적인 모습으로 당과 빅 브라더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기대했다면 크게 실망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행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무리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주인공인 윈스턴의 심리적인 묘사를 아주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인공인 윈스턴이 고문을 받으며, 등장인물인 사상경찰(?)인 오브라이언과의 밀도 있는 대화는 극의 재미를 배가시켜주고 있다. 오브라이언은 자신만의 주장인 당과 '빅 브라더'의 존재에 대해서 치밀함을 보이며 전체주의 사회를 옹호하고 있으며, 교화해야 할 주인공인 윈스턴을 설득하는 과정 중에 나눈 대화는 소설의 전체를 압도할 만큼의 파괴력을 느꼈다.

 

《1984》를 읽고 무엇을 느끼든지 간에 이 소설이 주는 의의는 명확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런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는 자유로움과 행복함은 고마운 일이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제시한 의견들을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 하여 타인을 배척하거나  고통을 주는 사회는 분명 전체주의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맹목적인 획일화는 우리 스스로를 파면으로 이르게 될 것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양성을 지켜주며 감시가 아닌 관심으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짧은 지식으로 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내본다. 이 소설 꼭 읽어 봤으면 하는 개인 추천 도서 중에 하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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