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불안과 폭력을 다룬 심리 스릴러다. 상징적인 공간인 ‘홍학의 자리’를 중심으로, 인물들은 자신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침묵과 외면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결국 사건과 파국으로 이어진다. 진실이 드러날수록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흐려진다. 이 소설은 사건 그 자체보다 인간의 내면에 쌓여가는 불안과 자기 합리화, 그리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욕망’이 만들어 내며 드러나지 않는 폭력성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홍학의 자리
정해연
엘릭시르 · 2021.07.26 · 한국소설
2025.12.24 ~ 12.29 · 6시간 33분
2025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독서는 ‘홍학의 자리’이다. 사실 이 책은 오랫동안 보관 중이었던 소설로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쟁여 놓은 책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하는 마음만 있었지, 쉽게 손에 쥐게 되지는 않았던 소설이다. 2025년은 넘기지 않으리라는 마음만으로 한 해가 끝나갈 무렵에서야 읽게 되었는데, 읽으면서 왜 이제 읽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만큼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겨울과 참 많이 닮아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풍기는 환경적인 묘사와 분위기가 겨울과 잘 어울리는 소설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겨울의 따뜻한 분위기라는 느낌보다는 쓸쓸하고 싸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겨울의 쌀쌀한 바람을 맞은 듯한 인상이 남겨진 소설로 기억될 듯하다.
‘홍학의 자리’는 읽는 동안,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기도 하지만, 흐름이 줄다리기를 타듯 천천히 흐르다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듯 이어지기도 한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질서 정연한 일상적인 모습을 보일 듯하지만, 그 안에서는 언제일지도 모르는 불안이 층층이 쌓여 있는 모습이다. 극적이면서 극단적인 사건을 조명하 듯 진행한다기보다는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의 공기의 흐름과 사건 이후의 암묵적인 흐름이 이어지는 침묵과 주변인들의 시선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 그리고 지나쳐버린 순간들의 시선에 따라 여러 번 흐름이 바뀐다. 읽는 이로 하여금 활자를 통해 알게 되는 스토리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샌가 내가 그 사건의 흐름 속에 빠져 공간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된다. 비록 활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공간의 묘사이기는 하지만 머릿속에서 공간을 상상하여 연출하게 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소설이 인상적인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단순하게 나누지 않고 전개되는 흐름 때문이다. 명확한 가해자의 악마적인 묘사보다는 침묵과 외면으로 상황을 유지하려는 다수의 등장인물들의 태도에 있다.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믿기를 바라지만, 그 믿음으로부터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을 읽는 나에게도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모호한 분위기 탓에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어 혼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어느 순간 그들과 나의 공통점을 찾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도 가끔은 침묵으로 그리고 때로는 외면으로 처해있는 상황을 모면할 때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런 인간의 이기적 침묵을 정해연 작가는 특유의 필력으로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홍학의 자리’라는 제목은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자신의 삶을 내려놓은 고등학생 ‘채다현’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채다현의 담임선생인 ‘김준후’를 통해서, 그리고 김준호의 아내, 영주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홍학에 대해서는 다현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준후와의 불륜 대상자이자 원조 교제를 했던 다현의 처지, 그리고 담임선생 ‘김준후’ 처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된다. 홍학은 한 다리로 오랫동안 서 있는 모습에서 인간의 삶 역시 위태롭게 한 다리로 서 있는 것처럼 보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려 하지 않고, 균형이 깨질 위험이 보여도 각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데 급급할 뿐이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비겁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오인해서 볼 수 있겠지만, 그런 모습 속에서 비윤리적인 인간의 모습과 비도덕적인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 책임을 작가의 필력으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홍학의 자리’는 학교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다현으로부터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은 다현의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살인사건이 발생하지만 일상적인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위치를 지키며 문제없이 살아갈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정해연 작가는 일상적으로 보이는 불안한 흐름을 강조함으로써, 수면에 가려진 불안감의 불균형과 긴장을 읽는 이로 하여금 자각하게 만들려 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변을 관찰하는 시선과 작게 보이는 불편함과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 애매한 침묵들이 반복적으로 묘사되며, 살인사건으로 인해 작지만 불편한 기류가 누적된 심리 상태를 키우며,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현은 부모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라지만 할머니 마저 죽고 의지할 곳 없이 방황하다 담임선생 박준후와 함께 원제교제와 뷸륜을 저지른다. 담임선생인 박준후는 늦은 시간 학교에서 다현과의 관계를 끝으로 죽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다현의 시체를 유기한다. 그리고 다현이 행방불명으로 신고한다. 그리고 호수에서 다현의 시체가 떠오르고 형사들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디양한 사람들이 용의 선상에 오르면서 학교 경비원이 호수 근처에서 죽게 되면서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박준후의 아내 영주는 결벽증 환자이자 편집증 환자로 오랜 시간 준후와 떨어져 살아왔지만 관계 회복을 위해 박준후의 모든 과오를 덮으려 한다. 교감과 그의 아들은 다현과 오랜 친구였지만, 학교폭력으로 오랫동안 다현을 괴롭혀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현의 죽임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도 드러내는데, 특별히 악인이라고 볼 수 없고, 비정상적인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을 소설 속에서 내포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들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정의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는 공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담임교사인 박준후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내가 나설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인물, 교감선생과 그의 아들을 통해서 불편한 상황을 알고 있지만, 관계와 안정을 이유로 침묵으로 일관하는 인물, 박준후의 아내 영주를 통해서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인내하려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와 위치를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선택만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평범함 속에서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어지고 확대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다현의 죽음으로 살인사건이 발생하지만 직접적인 살인의 폭력을 드러내지 않는다. 악인으로부터의 폭력에 의한 살인사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인사건을 의도적으로 가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리고 살인사건의 이유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이어진 복선을 만들고, 때문에 다양한 인물들이 용의 선상에 오르게 되지만 가해자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다수가 침묵할 때, 푹력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침묵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문제를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는 침묵 속에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침묵은 불편한 진실을 덮으려는 의도적 합리화를 만들고 괜한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명분을 만들게 된다는 점을 소설 속에서 알 수 있다.
‘홍학의 자리’는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흐름은 유지된다. 그 흐름 속에서 자극적인 반전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압박과 도덕적 불편함 그리고 윤리적 충돌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건 해결을 위해 느린 듯 흘러가지만 결코 속도감 있게 진행하지 않는다. 심리적 불안감이 누적되고 축적된 기류에 긴장감을 강점으로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다현의 죽음이 가능하게 만든 인간의 의도와 사회적 침묵이 만든 태도를 끝까지 바라보게 되는 소설로서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사회적 이기심이 만든 소설로 대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악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문장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글이 뭔가 달라졌다’는 말씀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하셔서 농담처럼 “그동안 나이를 먹었다”고 대답했지만, 진심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인간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1순위는 재미다. 이 후기를 읽고 나서 덮을 누군가가 ‘재밌었다’고 말해준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나 역시, 인정욕구에서 자유롭지 않다.
<홍학의 자리-작가의 말>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