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부딪쳐 보는 것,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험을 하는 것”

Review/읽은 것들에 대해서

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인간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며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 이야기

by kimdirector 2025. 12. 15. 08:01
폐허가 된 세상에 인간이 떠난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존재들이 서로를 지켜내며 버텨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소설이다. 감염과 파괴로 문명이 붕괴한 이후, 살아남은 이들은 고립과 고독 속에 삶을 이어가지만, 어느 날 자신 외에도 타인이 존재한다는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낯선 존재와 조심스럽게 서로를 관찰하며, 경계와 신뢰 사이에서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서로를 통해 오래된 상처와 고립의 시간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 황폐한 세상에서도 관계와 연대가 아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소설은 고독과 생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살아 있음’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허블 · 2025.10.27 · 한국소설

 

2025.12.03 ~ 12.12 · 9시간 42분

 

 

 

 

 

 

내가 읽은 천선란 작가의 세 번째 소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이지만, 8월에 읽은 ‘천 개의 파랑’의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10월에 최신작이 출간되어 기대감을 안고 읽게 된 소설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10월에 출간하기는 했지만 바로 읽지는 못했고, 이미 다른 소설을 읽고 있었기도 했기에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그의 소설에서 좀비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천선란 작가가 좀비를 어떻게 그렸을까 기대감도 들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낮설움은 지울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이 소설을 읽고 후기를 작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이해력을 발휘되어야 할 소설로 기억될 듯하다. 이 소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지 않고, 가볍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게감만 있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인간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 소설은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다른 소설로 보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을 수 있고 이야기의 흐름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아니다. 이 소설은 다이내믹하거나 변곡점이 확연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아니기에 정서적인 느낌으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큰 틀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좀비 바이러스로 인해 폐허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이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지구에 남아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이 좀비들로 득실대는 가운데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남은 존재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미는 과정을 천선란 특유의 작가적 사유를 섬세한 필력으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좀비가 득실대는 폐허가 되어 가는 세상을 보여주기보다는 세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과 살아가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담고 있는 소설이다. 1부에서는 감염과 붕괴의 시작 단계에서 좀비의 재앙이 이주선으로 번지며, 무엇을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있고, 2부에서는 이주선에 탑승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부에서는 인간도 아닌 좀비도 아닌 존재들이 지구 멸망 이후까지 서로를 기억하며 지속적인 삶을 이어가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첫 번째 이야기, 1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에서는 지구를 떠난 이주선이 다른 행성으로 도피하는 과정 속에서 이주선 안에서도 좀비가 되어 있는 것들과 아직 인간인 주인공 ‘옥주’가 좀비가 되어 버린 자신의 오랜 친구인 ‘묵호’를 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하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주선을 배경으로 동면에서 깨어난 옥주는 지구에서 바이러스 감염으로 멸망에 가까운 붕괴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좀비가 된 동료 ‘테일러’가 대부분의 선원을 죽이고 묵호마저 감염시키고 만다. 그리고 이야기는 옥주와 묵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과거 속에서 가정 폭력을 겪으며 자라 온 삶을 이야기한다. 현실로 돌아와 묵호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만 끝까지 자신을 감염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옥주는 그의 마음을 읽고 사랑했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옥주가 무언가를 말하고, 건네며, 그 말들이 허공 속에서 흩어지는 순간들을 보며, 나를 돌봐줄 누군가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확인하는 순간들이 있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는 살아 있을 수는 있지만, 살아있는 상태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 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에서는 멸망해 가는 지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전히 지구에는 좀비들과 불편한 동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자신들의 가족들 마저 좀비가 된 채로 함께 버텨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비’는 의식조차 없이 좀비가 되어 버린 엄마를 돌보며, 아버지 ‘비둘기’는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생존해 간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인연이 생긴다. 한쪽 다리를 잃은 딸, 정신 발달 장애를 가진 ‘노윤’과 함께 살아가는 ‘은미’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은미를 제비가 구해주면서 그들의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엄마와 딸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서도 죽이지 않으려는 의지와 잃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마지막 의지를 그리고 있다. 또한, 타인의 숨소리를 통해서 살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느끼지만 그 존재는 낯설기도 할 것이고, 위협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제비’는 그 숨소리를 듣는 순간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즉 세상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감각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이야기, 3부 ‘우리를 아십니까’에서는 오직 좀비와 동식물만 남아 있는 지구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지만, 기억과 의지를 지닌 아내를 카트에 싣고 바다로 향하는 화자의 여정을 담고 있다. 아내가 좀비가 되기 이전에 화자가 혼수상태 속에서 사경을 헤맬 때, 아내가 남긴 녹음 파일을 들으며 두 사람이 함께 기르던 거북이 ‘장풍’과 함께 긴 여정을 떠난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이야기, 결혼한 이야기들의 추억거리를 회상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여정 속에는 아내의 녹음파일 속에서 듣게 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싶은 이야기, 지키려고 했던 인간적인 것들을 되새기며, 살아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여정이 도피와 생존의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된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뛰는 심장이나 온기가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됨을 느끼게 된다. 좀비가 되어 버린 둘의 마지막은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아마도 1부와 2부와는 조금은 결이 다른 단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마지막으로 끝낼 이야기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겠다는 점이다. 문명은 무너졌지만, 서로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라는 단어로 감상적인 표현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라는 연대감으로 서로를 보고, 듣고, 느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점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있듯이, 멸망한 지구와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립과 고독함이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생존하는 방식을 유지하며, 좀비가 되어 버린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고, 연대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부에서는 인간의 흔적마저 사라진 세상 속에서 고립과 고독에 익숙해져 가지만,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이 오로지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미세한 징후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마주하게 되는 인간들의 경계 속에서도 내면의 긴장감은 유지되고 홀로 버티는 존재와 생존의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침식된 인간성과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는 정서적으로 회복되어 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3부에서는 멸망 속에서도 세상으로부터의 연대와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치, 그리고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강조하며, 오랜 고독으로 인해 끝에서 만나는 조용하지만 조금은 애틋한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즉 한 문장을 말하자면 고립과 고독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타인을 통해 살아 있음을 기억한 뒤, 마지막으로 서로를 ‘우리’라 부를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흔한 좀비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너진 세상 속에서, 좀비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서 생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명확할 것이라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다이내믹함 보다는 차분하고 절제된 톤을 유지하고 있다. 문장에는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고 진행된다. 고립이라는 단어와 고독이라는 감정적 표현이 절제됨에서 오는 인간의 불안 심리와 불안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좀비 영화처럼 폭력적인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특징일 것이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채색에 가까울 만큼 차갑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가지는 고독함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배경이 주는 의미가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부분은 세 가지로 함축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다. 고립감과 타인과의 조우, 그리고 관계의 형성을 통해 변화되고 있는 과정을 읽는 이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들리지 않는 느낌, 반응 없는 타인,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감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주는 관계의 시작점은 사랑이라든가 신뢰라는 것들이 아닌 그저 내가 살아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문명은 붕괴되었지만,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관계가 남아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인간다움이란, 제도나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서로를 향한 감각에서, 그리고 새로운 연대를 통해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작은 숨소리조차, 타인이 함께 있다는 감각, 함께 또는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서 조용하게 형성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라는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단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은 무너져도 누군가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조용한 확신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자 믿음일 수 있겠다.

 

 

 

 

인상적인 문장

 

엄마는 자주 이 집에 박제된 것 같아.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낡아가는 사람. 햇볕에 삭고 바람에 풍화되는 사람. 죽어가는 게 아니고 메말라 가는 사람. 벼락 맞은 나무 같고, 숨 쉬어본 적 없는 플라스틱 장난감 같고, 내 이름을 불러본 적 없는 그런 사람. 그런데도 내 삶의 표본이 되는 사람. 영원히 박제하고 싶은 사람. 그렇게라도 보고 싶은 사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 내용 중에서

 

물리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난다. 무섭다. 살짝만 물리고 싶은데 자칫 살점이 다 뜯겨 죽을 것만 같다. 아프게 죽는 건 싫다. 그래도 나한테는 총알 하나가 있다. 이걸로 나를 쏴야 할까, 아내를 쏴야 할까. 매일 밤 고민한다. 아내를 쏘자니 나 혼자 이곳에 남고 싶지 않고, 나를 쏘자니 감염되어 그 군인처럼 홀로 뛰어갈 아내가 생각 나 눈물이 나서 안 되겠다. 우리가 영원히, 지금처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3부 우리를 아십니까 : 좀비가 되어버린 아내 앞에서 갈등을 하는 장면> 내용 중에서

 

이로 깨물어 피를 낸 아내의 입술과 내 입술을 맞대어 입을 맞췄다. 나는 아무래도 너한테 감염되고 싶어. 내가 이렇게 느끼한 말을 한 걸 알면 아내가 진절머리를 칠 건데. 그래도 봐주겠니? 낭만적인 멸망을 맞이하자. 지구를 독차지한 기념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3부 우리를 아십니까 : 좀비가 되어버린 아내와 함께 하는 장면> 내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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