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역사를 넘어 자연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세월 속에서도 이어지는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작품

할매
황석영
창비 · 2025.12.12 · 한국소설
2026.06.12 ~ 06.16 · 06시간 19분
황석영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소설을 직접 읽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너무나 유명한 소설들이 많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객지’, ‘삼포 가는 길, ‘장길산’, ‘손님’, ‘철도원 삼대’ 등 많은 소설들이 있지만, 대부분 그의 소설들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다고 봐도 좋겠지만, 아쉽게 읽어 본 소설이 없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동안 왜 읽어보려 하지 않았나 조금은 후회가 앞서긴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읽어 볼 참이다. 먼저 읽어 본 소설인 ‘할매’는 2025년에 출간된 소설이고 제목만 보면 우리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 세대를 조명한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책을 펼치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600년을 살아온 팽나무라는 점이 독특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팽나무의 이름이 ‘할매’라는 점도 독특하다. 왜 할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소설은 금강 하구까지 날아온 개똥지빠귀 한 마라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개똥지빠귀는 긴 여행의 끝에 생을 마감하지만, 뱃속에 품고 있던 팽나무 씨앗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그렇게 자란 팽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자 사람들에게 할매라 불리는 존재가 된다. 처음 등장씬이 웅장한 모습으로 팽나무 주변의 생태 보고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생명의 끝이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 된다는 설정부터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팽나무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간궁상들의 삶을 지켜보게 된다. 굶주림을 피해 절에 들어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갯벌을 일구던 몽각은 나무 아래에서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고창댁은 할매와 영적으로 교감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천주교 신자 유분도, 사랑이 곧 하늘이라는 신념을 품고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배경순의 이야기 등 팽나무와 함께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지켜보며,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지만 할매의 그늘 아래에서 삶을 이어가며 하나의 역사로 연결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수많은 민초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팽나무와 함께 따뜻하면서도 생생하게 그려진 부분도 나름대로 소설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이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팽나무를 둘러싼 다채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군산 비행장 활주로가 건설되고, 할매의 분신처럼 자라던 어린 팽나무가 일본군 특공대 사격 훈련의 표적으로 결국 말라죽고 만다. 해방 후에도 비극은 이어진다. 미군기지 확장과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과 수많은 생명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만다. 특히, 물길이 막혀 갯벌 위에서 수많은 조개들이 말라죽는 장면은 인간의 어리석은 개발이 자연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하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비극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비극적인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는다. 갯벌을 기록하는 활동가 배동수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유 방지거 신부는 파괴된 자연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으고 함께 활동하던 사람으로부터 마을 깊숙한 자리에 거대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철조망 안에 갇힌 팽나무 할매를 찾아가 끌어안게 된다. 그리고 팽나무 할매는 왜 이제 왔느냐며 유 방지거 신부를 다그친다. 죽음의 땅처럼 보였던 갯벌에서도 수많은 생명이 다시 살아 숨 쉬는 모습은 자연의 생명력이 인간의 탐욕과 욕심보다 더욱 강인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황석영 작가의 ‘할매’를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늙어 죽지만, 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기억하며, 다음 세대로 이어줘야 한다는 점을 황석영 작가는 팽나무 할매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넘어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할매’는 단순히 나무 한 그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600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 역사와 생명이 하나의 거대한 순환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해도 좋을 듯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자연의 긴 역사 속에서는 아주 티끌만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또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황석영 작가적 풍부한 상상력이 더한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는 점은 깊은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할매’는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과 근원을 되돌아보게 되는 소설로 기억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