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2살의 주인공 진희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외할머니, 이모, 삼촌과 살고 있다. 또래보다 조숙하고 성숙하면서 이지적이며, 세상의 이면과 허위를 일찍부터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삶에 집착할수록 상처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어른들을 바라본다. 위선과 모순 그리고 진실이 섞여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삶의 본질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4분

새의 선물
은희경
문학동네 · 2022.06.03 · 한국소설
2025.10.08 ~ 10.31 · 11시간 15분
오랜만에 한국소설을 읽게 되었다. 한국소설을 읽은 지 그리 오래된 느낌은 아니지만, 무더운 여름 때문이었는지 한참 지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올여름은 정말 역대급 더위가 아니었나 할 정도로 힘든 여름을 견뎌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때문에 여름 내내 읽은 책들을 무더위로 인해 잊히는 듯하다. 특히 은희경 작가의 책은 읽은 지 한 참 지난 것은 맞는 듯하다. 2021년도에 읽은 이효석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아가씨 유정도 하지’라는 단편을 읽은 것이 다였고 단편집의 주된 내용은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의 애정을 아들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풀어놓은 단편소설로 기억된다. ❬새의 선물❭은 은희경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하지만, 내가 읽는 은희경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기에 무언가 인연이 되어 가는 소설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새의 선물❭은 199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은희경 작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설은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으로 이후에도 꾸준하게 재판되거나 개정판으로 재출간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인기 있는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100쇄 돌파 기념으로 2022년에 개정된 ❬새의 선물❭을 읽게 되었다.
읽게 된 ❬새의 선물❭의 개정판이기는 하지만, 은희경 작가는 많은 내용을 바꾸지는 않았다고 했다. 개정판 작업을 위해 초판을 출간한 후 처음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쓸 때 절에 들어가 몇 달간 작업한 끝에 완성된 자신의 첫 번째 장편소설에 대한 애정을 얘기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단어를 매만지고 1969년이라는 시대적인 풍경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으며 이번 개정판을 준비했다고 했고, 개정판인 ❬새의 선물❭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충만하고 열띤 시간 속에 독자를 머무르게 해 줄 것이라 했는데, 이 말은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비록 내가 1969년을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1970년대와는 크게 달라진 풍경은 아닐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1970년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 기억이 생생하다. 비록 많은 기억이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새의 선물❭의 배경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년이나 지난 시대적 배경을 그려내고 있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대적 풍경이 그려내는 모습은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어린 추억 속 기억과 비슷한 풍경을 떠올려 보기도 하니 어린 시절, 동네에서 뛰어놀던 때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신기하다는 반응의 느낌이 들었다. 소설 속 주된 배경은 남도의 작은 도시, 시골의 작은 읍내 서흥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대부분 하숙집과 주변으로 이어지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하숙집과 이어지는 가겟집이 있고 안쪽으로 하숙집 주인 가족이 머무는 안채와 하숙인들이 머무는 별채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우물가가 있는 공간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하숙집 주인 가족을 먼저 소개하자면 이 소설의 주인공인 12살 소녀 ‘진희’가 살고 있고, 읍내에서 소문난 서울대 법대생이며 군대를 가기 위해 휴학 중인 삼촌과 하릴없이 지내는 ‘영옥’ 이모, 그리고 하숙집 주인인 외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하숙집에서 살고 있는 장군이와 장군이 엄마, 장군이는 진희와 동급생이지만 친구로 지내지는 않는다. 하숙생인 진희가 다니는 학교에서 무용을 가르치는 최 선생과 이선생이 함께 살고 있고 마지막으로 광진테라 양복점을 운영하는 두 살배기 재성이네 가족이 등장하고 뉴스타일양장점과 우리 미장원, 그리고 문화사진관 사람들이 마주하며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며 소설이 진행된다.
❬새의 선물❭의 주인공 ‘진희’는 여섯 살 무렵에 어머니는 죽음을 선택했고, 아버지가 가출하여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한다. 그 무렵부터 진희는 외할머니와 살게 되고, 소설 속에서는 진희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진희가 바라보는 하숙집 풍경과 가족, 주변의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며 시작 된다. 진희는 주변 사람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로 주변 인물들을 관찰자 입장에서 지켜보며 성장하게 된고, 소설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의미심장한 선언을 하며 시작된다.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문장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희는 스스로를 ‘보이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살아가는 삶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절제된 감정으로 주변 인물들에 냉정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들에 대해 아무런 의미 따위는 없다는 듯이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집 안팎에서 벌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늘 진희가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자신만 알고 있는 사람들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자신의 속마음이나 고민을 가족에게 조차 얘기하지 않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자기 분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판단하며 세상을 깨달아 가게 된다.
그리고 주된 이야기의 흐름은 진희의 가족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데, 하숙집 주인 외할머니는 보수적이며, 집안의 일들을 책임지는 생계적인 역할을 한다. 가족을 유지하고 체면을 중시 여기는 전통적인 여성상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진희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감정의 통제를 강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시대상으로 본다면 전통적인 가부장적 면모를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영옥’ 이모의 경우, 당시의 여성상으로 본다면 세련되고, 트렌드를 따르고, 자유로운 여성상을 갖추고 있는 현대적인 20대 여성으로 등장한다. 어찌 보면 전통적이며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성상인 하숙집 주인인 자신의 엄마이면서 진희의 외할머니와 자신의 자유분방하고 현대적인 여성상과의 대조적인 모습을 그리며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묘하게 충돌하게 함으로써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영옥은 펜팔 친구를 소개받고 군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져 남자친구가 되지만 가장 친한 친구 ‘경자’에게 남자 친구를 빼앗겨 심한 배신감과 상실감에 빠져 홍역을 치른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는 읍내에서 제일 큰 병원의 아들인 홍기원과도 연결되어 있고, 삼촌의 친구가 잠깐 하숙집에 머물게 된 허석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동네에서 큰 공장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로 인해 죽은 친구 경자로 인해 심한 자책감 때문에 또 한 번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허석과도 인연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영옥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이렇게 이야기의 큰 흐름 속에는 12살 진희와 영옥 이모 간의 연대를 이어가며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허석이라는 인물은 진희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지만 허석은 영옥 이모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자신과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모에게 양보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진희, 자신의 감정을 이모에게 드러내지 않고 양보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습 또한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를 분리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납득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분리시키는 모습을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희 가족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갈등으로부터 일어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단편으로 연결하며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며 구성하고 있는 것도 이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진희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다양한 모순된 모습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그 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숙집의 비워있는 방에서 장군이 엄마와 이선생이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장군이와 그 사실을 알면서 눈 감아 주는 외할머니와 이웃 사람들의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속에서, 그리고 광진테라 양복점을 운영하는 재성이 아빠의 가정 폭력으로 인한 재성이 엄마의 가출사건의 경우, 재성이 엄마는 결국 돌아오지만 가정 폭력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납득하기 어려울 듯싶다. 가출은 했지만, 재성이 아빠가 잘 살고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궁금해하고, 두 살배기 재성은 별 탈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를 궁금해하고, 그러고도 둘째 아이를 갖는 모습, 그리고 비워있는 하숙방에 새로 이사 온 남매에 대한 문제도 있다. 누나는 전화 교환소에서 일하는 교환수이지만, 예쁜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부남으로 인해 유부남의 아내가 찾아와 남편한테 꼬리치고 다닌다고 해서 심한 구타를 하게 된다. 누나 자신은 그런 사실이 없는데, 다짜고짜 찾아와 폭행을 일삼으며 우리 남편은 그런 일이 없는데, 너 때문이라는 이유로 남동생이 보는 앞에서 폭행을 일삼는 여자의 모습에서, 그리고 외할머니는 대놓고 떠나라고 할 수 없었지만 떠난다는 남매에게 위로를 하는 척하지만, 결국 떠나기를 바라는 모순적 태도, 뉴스타일양장점의 미스리가 돈을 훔쳐 도망간 사건으로 인해 외할머니는 계모임이 깨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에서 진희는 모순된 어른들의 세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려 세상의 모든 일은 모순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이 밖에도 학교에서 진희와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도 모순된 모습을 보게 된다. 진희는 흥부와 놀부 연극 대회에 오르게 되는데, 흥부 부인역을 맡은 친구가 지나치게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에 진희는 친구의 옷을 찢어 버리고 무대에 올라간다. 옷을 너무 심하게 찢은 탓인지 팬티가 보일 정도이지만, 진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와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지만 친구는 옷을 찢겼다는 서러움과 창피함에 울부짖는다. 심사관들은 연기에 감탄을 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다. 결국 그 친구는 큰 상을 받았지만 그때까지도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에서 모순됨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읍내에서 제일 큰 비누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화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화상으로 인한 부상자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을 바라보며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도 모순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화재로 인해 영옥 이모의 오랜 친구인 경자가 사망하는 일로 인해 심한 상실감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렇듯 어른들의 모순된 행동과 모습들 속에 진희는 그 모든 순간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바라보고 지켜볼 뿐이다. 이런 순간에서도 진희는 철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하여 세상을 이해하려 하는 자세를 취한다. 어른들의 모순적인 태도와 때로는 위선적인 행태를 단순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자기 분리를 이용하여 철저하게 보이는 나와 보이는 나로 해석하며 어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럴 것이 어린 12살 아이의 입장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시선도 있겠지만, 자신 스스로는 이미 12살이 아닌 자신을 받아들여 여느 다른 또래 아이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 자신에 대한 도도함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이 또한, 오로지 자신의 내적 성향일 뿐이다. 아이는 아이다라는 식의 어른들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스스로 조숙하고 성숙하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다. 모순된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만, 세상은 움직이고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고, 모순은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에 있는 에필로그에 잘 드러나는데, 진희는 서른여덟이 되어, 기억하고 있는 1969년을 회상하며 흐른 시간을 되뇌며 하는 말들이 있다. 이때에도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할머니와 이모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도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삶을 그렇게 살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로 분리시킬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엄마의 자아처럼 분열 돼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없다. 나는 거리 밖에 있는 내 삶을 그런대로 성실하게 꾸려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문장이 아마도 진희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에서 오는 마지막 결론일 듯하다. ‘열두 살 이후로 나는 성장하지 않았다’는 의미와 ‘보여지는 나’와 ‘보이는 나’를 분리함으로써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느끼거나 상처받지 않으려는 의도된 행동에 대한 자기 고백과 같은 문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가 자신이 6살 무렵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택한 일과 가출한 아버지에게서 받았을 상실과 고통 그리고 상처, 그리고 영옥 이모가 받았을 상실과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것들로 인해 자신은 철저하게 자기 분리를 통해서 고통받지 않으려는 태도가 마지막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고 볼 수 있겠다. 분명 ❬새의 선물❭은 어렸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한 자기 성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모르고 지난 친 것들에 대해서 이제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는 것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은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새의 선물❭이라는 제목에 의미는 프랑스 시인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의 동명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이 가지는 주된 주제 의식과 일맥상통한다고 불 수 있고, 동일한 핵심 주제와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낯선 시인이기에 잘 모르겠지만, 시의 내용 중에서 인용된 부분을 통해서 소설의 제목을 빌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이 한 구절 속에는 진희의 냉소적이고 상실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해바라기 씨앗’은 따뜻한 위로나 선물로 해석되며, ‘감옥’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주인공 진희가 겪은 상실과 고통의 성장통과 자신의 내면에 깃든 고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겠다. 12살 시절의 기억 속에 갇혀서 상실과 고통, 상처가 자신을 옮가매는 감옥으로 인식하고 자신 스스로의 삶의 본질을 일깨우게 해 준 선물임을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새의 선물❭은 모순된 삶이라도 기꺼이 받아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선물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답지만 아프고 슬픈 기억, 그리고 자유로움을 의식적으로 꿈꾸지만 현실에 갇힌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해하려 했다. 단순하게 활자만 보고 읽으면 아무런 감흥이 일어나지 않기에 조금은 난해한 소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소설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인상적인 문장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이십 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새의 선물-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내용 중에서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새의 선물-희망 없이도 떠나야 한다> 내용 중에서
슬픔.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 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슬픔을 느끼는 나를 일부러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 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다. 슬픔을 느끼자,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새의 선물-내 넨네 죽어 땅에 장사한 것> 내용 중에서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새의 선물-모기는 왜 발바닥을 무는가> 내용 중에서
나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이야깃거리일 뿐이지만 착한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그것은 비극이 되기 때문이다.
<새의 선물-태생도 젖꼭지도 없이> 내용 중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험심이 부족하다. 진정한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는 자기의 삶이라고 믿고 견디는 쪽을 택한다. 특히 여자의 경우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배후에는 ‘팔자소관’이라는 체념관이 강하게 작용한다.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체념은 여자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연히 닥쳐온 불행을 떨쳐내지 않고 받아들이도록 만듦으로써 더 많은 불행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새의 선물-태생도 젖꼭지도 없이> 내용 중에서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 준다. 현석 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써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새의 선물-응달의 미소년> 내용 중에서
누구의 삶에서든 기쁨과 슬픔은 거의 같은 양으로 채워지는 것이므로 이처럼 기쁜 일이 있다는 것은 이만큼의 슬픈 일이 있다는 뜻임을 상기하자. 삶이란 언제나 양면적이다. 사랑을 받을 때의 기쁨이 그 사랑을 잃을 때의 슬픔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그러니 상처받지 않고 평정 속에서 살아가려면 언제나 이면을 보고자 하는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새의 선물-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깊은 것을> 내용 중에서
선한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지만 악에 대해서는 실수라거나 충동이라거나 하는, 자신의 통제로부터 이탈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달아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은 삶을 위대하고 진지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만 보려는 서정적 인간임이 틀림없다.
<새의 선물-빛이 밝을수록 그람자도 깊은 것을> 내용 중에서
나는 삶의 기회에 대해 생각했다.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새의 선물-사과나문 아래에서 그녀를 보았네> 내용 중에서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이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 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새의 선물-사과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보았네> 내용 중에서
나는 이모와 허석과 할머니에게 한꺼번에 배신당했으며 더욱 비참한 것은 그렇게 배신당한 것을 아무에게도 눈치 채여서는 안 되므로 이모처럼 노골적으로 비탄에 빠질 수도 없고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내 고통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의 선물-사과나무 아래에서 그녀를 보았네>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