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한 남자와의 관계를 이어가지만, 남자의 집을 드나들며 자신과 그의 집안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적·정서적 간극을 뼈저리게 느낀다. 겉으로는 친절하고 안정돼 보이는 공간인 그 남자네 집은 주인공에게 소속될 수 없는 세계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위축시키는 공간으로 변해간다. 작품은 개인적 사랑의 서사를 통해, 전후 한국 사회의 빈곤과 계급 차별, 여성의 취약한 위치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상처와 자기 인식이 변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세계사 · 2012.01.22 · 한국소설
2026.02.01 ~ 02.06 · 10시간 25분
오랜만에 박완서 작가의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2022년에 읽은 ‘나목’을 끝으로 한동안 읽지 못한 부분을 나름대로 채워가는 느낌으로 읽은 소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에서는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정겨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따뜻함이 있고 예스러운 면과 문장에서 구수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읽는 재미를 있다. 물론 생경한 단어들,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단어들과 문장에서 조금은 낯설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까지 볼 때, 박완서 작가의 글에서는 늘 오랜 친구처럼 익숙함이 느껴져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 남자네 집’에서도 박완서 작가 특유의 문체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집중력이 더 생기는 놀라운 경험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뭐 지금까지 읽은 책은 5권밖에 없지만, 이렇게 한 권 한 권 읽다 보면 언젠가는 그의 책을 모두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또 그의 책을 모두 읽고 싶은 욕심도 부리고 싶는 것이 개인적인 욕심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닌 박완서의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면 같은 마음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판단해 본다. 그만큼 박완서 작가는 우리나라 문학에 있어서 중대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읽은 박완서의 책들에는 공통적인 부분이 있는데, 한국전쟁 전후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처음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일제강점기 말기에서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는 후속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시점부터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나목’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모두 박완서 작가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서사가 담겨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전쟁 전후의 배경 속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념 갈등과 살아야겠다는 의지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시절의 박완서와 마주하는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다. 모두 직접 겪으며 경험한 것들이 이야기로서의 소재로 활용되며 서사로 이어지는 것도 특징이 된다고 생각한다. 미군부대 생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도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그 남자네 집’의 시대적 배경도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인 ‘나’는 미군부대에서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첫 시작은 화자인 ‘나’는 현재 중년의 모습에서 오랜만에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첫사랑의 남자를 떠올리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첫사랑의 남자와 교제하게 된 배경과 당시의 생활 형편을 담담하게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가끔은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를 혼돈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화자 ‘나’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삶의 안정이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거의 갖지 못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난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남자는 생활이 안정적이며 집안 역시 정돈된 중산층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소설 초반의 ‘나’는 남자 개인에 대한 감정보다는 그를 둘러싼 환경, 즉 ‘그 남자네 집’이 상징하는 안정감과 여유에 자연스럽게 끌린다고 볼 수 있다. 그 남자의 집을 찾아가거나 언급할 때, ‘나’는 그 남자의 집을 자신의 현실과는 다른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고, 은근한 동경과 기대를 품게 된다. 이런 부분들은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집착이라거나 욕망이 아닌 가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판단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무의식적인 탈출 욕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 남자와 결혼하고 ‘그 남자네 집’에 살면서 미묘한 불안감을 감지하게 된다. ‘나’는 그 집에서 손님처럼 혹은 임시적인 존재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 남자네 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화자인 ‘나’와 남자 사이의 알 수 없는 거리감과 계층적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서 시댁 살이에서 겪게 되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태도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노골적으로 무시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지만, 말투와 행동, 사소한 생활 관습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남자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안정에 대한 기대인지 모를 혼란을 겪지만, 그 남자네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물질적, 사회적 안정감이 욕망과 얽혀 있음을 스스로도 부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화자 ‘나’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중, 한 동네에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함께 성장한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시댁에서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5시가 되면 시장에서 장을 보는 시간에 맞춰 비밀연애를 이어가게 된다. 비밀연애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나쁘게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소설 속에서는 단순히 대화를 나누고 장을 보며 가끔은 영화 한 편을 보는 정도로 이야기되고 있다. 비밀연애를 통해서 잠시나마 숨통을 틔워준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갑갑한 일상에 자기 존재가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감정,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 안도감을 느꼈을 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화자 ‘나’에게는 순수한 낭만이라기보다는 답답한 결혼생활 속에서 맛볼 수 있는 안정과 기대가 동반되는 즐거움으로 제시된다고 하면 맞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결국, 비밀 연애를 이어가던 남자와 청량리역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그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렇게 끝나나 싶었지만 그 남자는 만나기로 한 날짜에 머리에 이상 증세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그 남자는 실명을 했고 가끔은 친정에 놀러 온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하지만, 새울이 흐른 뒤에는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시절 잠시 누렸던 하나의 사치처럼 지나감을 인식하고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는 춘희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화자인 ‘나’는 결혼으로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웃사촌인 춘희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하지만 춘희는 미군과 연애를 하면서 원치 않는 아이를 가지고 되고, 낙태를 하는 반복된 생활을 하게 되지만, 춘희의 꿈은 미국으로 가는 것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결국 춘희는 어려움 끝에 한 필리핀계 미국인과 결혼을 하고 원하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형제 모두를 미국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먼 훗날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자 한국에 입국한 춘희는 화자 ‘나’를 만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개인적으로 춘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부분들을 이야기하자면 화자 ‘나’와 비교되는 인물로 보인다. 현실 감각이 강하고 계산적인 태도를 안고 있는 인물로 사랑이나 감정보다는 생존과 조건을 먼저 따지는 인물이다. 남자와의 관계 혹은 남자를 둘러싼 환경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며,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감정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것들 때문인지 화자 ‘나에게는 불편한 거울처럼 보일 수 있으며, 자신의 순진함과 취약한 위치를 자각하게 만들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을 알 수 있었던 부분이 위에서 언급한 춘희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돌아온 한국에서 화자 ‘나’와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남자네 집’ 속에서 드러난 몇 가지 주제 의식을 살려보면 좋을 듯하다. 화자 ‘나’는 순수한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불안정한 삶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 전쟁 전후로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화자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그 남자를 만나면서 감정적인 위안이자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통로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남자네 집’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이라는 점을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뜻하고 안정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남자네 집’은 개인적으로 과장된 느낌일 수 있지만,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 유교적인 생활 관습으로 인해 비교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또한, 소설 속 등장하는 춘희의 모습을 보며 여성의 취약한 위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은 관계 속에서 평가되고 선택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기보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불편함을 감내하지만, 결코 평등한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 여성에게 허용된 삶의 조건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잘 들어내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 구조의 문제로 확장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 남자네 집’을 바라보면 느꼈던 또 다른 감정이 있었다.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네의 주변 이야기를 담은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되어 볼 수 있는 점이 나름대로 나의 기억 저편에 숨겨져 있던 모습들을 회상하는 재미도 누렸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식구가 늘고, 살림을 늘리고, 집을 넓히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점도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익숙한 동네 이름을 볼 때면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는 재미도 얻을 수 있는 점이 정겨워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른들에게 듣던 과거 속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흐뭇한 기억이 좋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알 수 있었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는 점이 좋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책들은 시간이 지나 읽었을 때, 지나치게 시대적인 감정으로 인해 이질적으로 느껴져 잘 읽히지 않는 점에 반해 다른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박완서 작가만이 가지는 탁월한 문체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투박하게 읽힐 때도 있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정제된 느낌을 많이 받는 점은 화려하지 않음을 담담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박완서 작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신이 겪으면서, 경험하면서 체득된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점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민주주의 운동, 계층 간의 양극화 문제 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닌 그의 삶 속에 녹여져 체득된 주제의식을 화려하게 포장하려 들지 않는다. 딱딱하고 묵직할 것 같은 글들도 박완서 작가의 손을 거치면 부드러우면서도 시각적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문체에서 본질을 흐리지 않는 점도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